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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152
한자 梁山郡通度寺紙役革罷及各樣雜役存減節目
영어의미역 Document-Releasing from Making Paper Labor of Buddhist Monks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연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잡역 면제 문서
발급자 경상도 감영(監營)
수급자 통도사
발급일시 1838년(헌종 4)연표보기
소장처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처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838년(헌종 4) 경상도 감영에서 통도사에 잡역을 혁파해 준다고 발급한 문서.

[개설]

조선시대 불교계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포함하여 많은 부문에서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 조선 왕조에서 사회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고 사원 소유의 전지(田地)와 노비를 압수하면서, 그 후 불교계는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찰과 승려는 신분적 천시를 받으면서 각종 잡역에 동원되는 등 수탈을 감당해야만 하였다. 잡역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종이를 만드는 지역(紙役)이었다. 특히 사찰의 지물 공납은 대동법 시행 이후 대폭 증가하게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민간의 닥나무 재배지가 곡물 재배지로 변화되면서 지물 생산이 급속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국용지의 공급원으로서 사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 공헌(貢獻)하는 종이는 승려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헌종 대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은 국가의 지물 생산소로 전락하거나 각종 공물의 공급처가 되었는데, 지리적인 여건상 닥나무가 자라지 않는 양산 통도사, 의성 고운사 등에까지 지물 공납이 할당되기도 하였다. 사찰은 이러한 공납의 할당과 더불어 지방 관리나 유력자들에 의한 사사로운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제작발급경위]

1838년(헌종 4)에 경상도 감영에서 당시 통도사에 부과되었던 지역을 포함한 각종 잡역을 혁파해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당시 통도사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종이를 조달하기 위해 울산과 경주 등지에서 저(楮)를 구입해 종이로 제작하여 납부하기도 하였다. 이에 통도사가 과중한 부담과 수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통도사 승려들이 보낸 호소문을 받아들여 취해진 조치였다.

[형태]

문서는 가로 55.6㎝에 세로 31.4㎝ 크기로 황지(黃紙)에 작성되어 있다.

[구성/내용]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은 조선 1838년(헌종 4)에 경상도 감영에서 당시 통도사에 부과되었던 지역을 포함한 각종 잡역을 혁파해 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절목에는 여러 가지 잡역의 세목(稅目)을 열거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은 조선시대 당시 사찰에 부과되었던 공역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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