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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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通度寺釋迦如來掛佛幀 |
영어의미역 | Buddhist Painting of Tongdo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정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2년 10월 19일 -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보물 제135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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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보물 재지정 |
성격 | 불화|괘불 |
제작시기/일시 | 1767년 |
제작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작가 | 두훈(抖薰)|성징(性澄)|성익(成益)|수성(守性) |
서체/기법 | 모시바탕에 채색 |
소장처 | 통도사 성보박물관 |
소장처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
소유자 | 통도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1767년에 두훈 등이 제작한 석가여래 괘불.
[개설]
통도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두 점의 괘불 가운데 하나인 통도사 석가여래괘불탱(通度寺 釋迦如來掛佛幀)은 1767년에 제작되었다. 괘불은 불화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그림으로 야외에서 법회를 열 때 걸어서 예배에 사용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평소에는 괘불함에 말아서 보관하며, 부처님오신날이나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예수재(豫修齋), 기우재(祈雨齋) 등 대중이 모이는 날 불전 마당에 걸어 법회에 사용한다. 2002년 10월 19일 보물 제135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모시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은 폭이 493㎝, 높이 1,204㎝로 폭과 비교하면 길이가 길다. 상단과 좌우의 변(邊)에는 범자문을 둘러 화면을 구획하고 있으며, 원형두광(圓形頭光)을 따라 화사한 구름무늬가 둥글게 감싸고 있다. 영락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형의 주존(主尊)은 상체가 넓고 둥근 편이며, 좌우 성중들을 생략하고 독존(獨尊)을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한 간략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두광은 녹색 바탕에 안에서부터 순서대로 육색, 주홍, 군청, 삼청 네 겹의 굵은 테두리를 두른 원형두광을 취하고 있으며, 목이 굵게 묘사되어 상호는 세장(細長)한 느낌이 들고 있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불의(佛衣)에 비해 모란꽃이 장식된 신광(身光)은 채색을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불신(佛身)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의 수화사(首畵師)인 두훈(抖薰)이 한 해 앞서 즉 1766년에 조성한 「법주사 괘불탱」과 비교해 볼 때 세부적인 표현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이나 크기, 문양, 색감, 도상 등에 있어서 두 괘불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징]
본존은 일반적인 석가여래의 도상과 달리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으로 표현하였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다섯 구의 화불을 좌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중앙의 여래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주존의 수인은 양손이 엄지와 중지를 맞대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상태에서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려 연화 가지를 들고, 왼쪽 손바닥으로는 연화 가지의 밑을 받치고 있다.
이러한 도상에 대해 「통도사 개성괘불기(通度寺 改成掛佛記)」에는 ‘비로법계신(毘盧法界身)의 그림자 가운데 그림자인 석가여래장육금신상(釋迦如來丈六金身像)’이라고 밝혀 조선 후기 불화 도상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의의와 평가]
통도사에는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의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통도사 개성괘불기」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통도사 개성괘불기」의 기록에 따르면 1767년에 조성된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에 앞서 1649년(인조 29)에 조성하여 봉안되던 통도사 괘불을 1766년 성도재일(成道齋日)에 현괘했다가 바람에 의하여 찢어지자, 1767년에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을 다시 조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의 조성에 동참한 80여 명의 시주자의 거주 지역을 살펴보면, 대체로 당시 동래 범어리(凡魚里)로 불리던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면(勿禁面) 일대를 비롯하여 울산·울주·언양·부산 지역 등 주로 통도사 인근에 집중되고 있어 지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