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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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以命 |
영어음역 | An Im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양산 출신으로 큰 공을 세운 무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조선 전기 중종 때에 평산부사를 지낸 안우(安宇)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안근(安瑾)이며, 형 안시명(安諟命)과 사촌으로 안신명(安信命)이 있다.
[활동사항]
안이명은 1590년(선조 23)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아버지 안근을 따라 형, 사촌들과 함께 양산 지역을 지키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4월 16일 의병들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양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안이명은 청도 운문사에서 청도 의사 박경전과 합세하여 청도 산중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592년 6월 5일에 경주 문천에서 각지의 의병들과 회합 동맹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에 안이명은 청도·밀양·동래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경주와 영천 지역 싸움에서 우리 측의 많은 정예 선봉을 잃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강화의 논의도 있었으나, 왜적들은 물러갈 뜻을 보이지 않아 적개심은 더욱 높아갔다. 1596년(선조 29) 3월 1일 아버지 안근, 형 안시명과 함께 팔공산의 영남의병들과의 회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다시 군대를 편성하여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고 각 읍 탈환을 기도하며 일대 전격전을 개시하였으며, 왜적도 오랜 싸움으로 지쳐 전선을 축소하기 시작하였다.
안이명은 1597년(선조 30) 7월 21일 화왕성에 가서 곽재우와 함께 성을 정비하여 출전하였고, 동년 9월 14일에 대구까지 진군하는 동안 적 수백 명을 베는 등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백호장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안이명은 화왕성에서 임무를 마치고 당포로 가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육전에서 못지않게 전공을 많이 세웠다. 1597년(선조 30) 10월 16일 밤에는 해남에서 적 13명을 베었으며 왜적에게 투항한 송원봉의 목을 베어 왔다. 이후 훈련원정,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부임하였다.
안이명이 곽재우와 함께 화왕성에서 활약한 일은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에 의거하여 전해져 왔다. 그러나 『난중일기(亂中日記)』의 1597년 2월 4일자에서는 안이명을 당포만호(唐浦萬戶)로 기록하고 있어, 1597년(선조 30) 7월 21일부터 같은 해 9월 14일까지 곽재우와 함께 활약하였다는 기록과 시기가 겹치는 모순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산87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시의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 일등훈에 훈록되었으며, 1835년(헌종 1) 오충사를 건립하여 입향하였으며, 광주안씨 일문을 기려서 양산 소계서원(蘇溪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