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B01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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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명환 |
지산리에는 농사 시기에 모내기, 타작을 할 때 품앗이의 목적으로 만든 계가 있다. 이 계가 만들어진 계기는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 그리고 여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1970년 초반 만든 것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운동으로 근대화의 힘찬 민족운동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을 무렵, 지산리 마을에서도 마을의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되어 농촌을 살리고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자는 의지로 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 모임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두레’ 또는 ‘품앗이’와 비슷한 형태로써,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농사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혹은 많은 소득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시작되었다. 지산 양장웅 이장을 마을 집담회에서 만나 우리는 일심계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이 계는 역사가 억수로 길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맥을 빛내믄서 지금까지 지산리의 자랑거리로 남아 있다카이. 사무실은 없다쳐도 법인단체로 되가꼬 이 계가 억수로 큰 편인기라. 재무님이 일심회 회장이다 아이가."
이처럼 일심계는 마을의 떳떳한 살아있는 역사로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고 있는 중요한 조직이다. 일심계는 마을사람들이 다 같이 합심하여 1972년 5월 18일, 지산마을회관에서 마을 총회를 열고 많은 의견들을 공유하여 토의한 결과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계의 명칭은 일심저축계(一心貯蓄契)라 하였다.
계가 만들어지고 6월의 회의에서는 모내기를 서로 품앗이로 돕고, 농사를 지을 때 소가 없으면 논을 가는 날을 정하여 도와주고, 회원 한 집당 일정량의 보리쌀을 거두어 팔아 현금으로 모으기로 하였다.
그 해 7월부터 꾸준히 달마다 회의를 한 일심저축계는 활동을 점검하고 많은 안을 내어서 계가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농협에 자금을 빌려서 8마력의 힘을 가지는 발동기 1대와 탈곡기 1대를 구입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구입한 탈곡기는 가을의 벼 타작을 위해서 쓰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탈곡기 사용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해, 탈곡기를 사 놓고도 이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10월이 되어 탈곡이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농로가 없었기 때문에 발동기와 탈곡기를 이 논 저 논으로 옮겨가면서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면 밤에는 횃불을 켜들고 밤 10시가 되어야 끝났다고 하니 일심계 회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진 일심계의 활동은, 타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해 11월 결국 탈곡기로 탈곡을 하게 되는데, 자동 탈곡기를 처음 쓰는 회원들은 자동 탈곡기가 보여주는 능력에 신이 나 일을 즐겁게 하고 결국 그 해의 온 동네 타작을 마쳤다고 한다.
기계와 탈곡기를 정비하여 창고에 넣고, 12월 그 해의 결산에 대해서 이야기 한 회의는 계의 성공적인 결과에 만족한 모임 회원들의 즐거운 자리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피와 땀을 들여 정성들인 농사의 결과가 풍년이었으니...
결산을 마치고 준비한 돼지고기와 푸짐한 음식에 거하게 술까지 한잔씩 나누어 마시니 사방이 회원들의 화기애애한 대화로 왁자지껄했다. 회원들은 타작할 때 싸웠던 일, 발동기와 탈곡기를 이 논, 저 논 옮겨가면서 미끄러진 일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힘들었던 농사의 고됨을 잊고 풍성한 결과에 배불러 하며 회장에게 애창곡을 한 곡 부르라고 권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잘도 넘어간다.” 회원들은 다 함께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 해 겨울은 논에 길이 없는 회원의 논에 길을 만들고, 논바닥에 있는 돌 빼기 작업으로 기계화영농작업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도박금지령을 내려 회원 상호간에 화합과 결속된 힘으로 마을의 안정과 근면의 분위기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1973년에 들어와서 안정된 운영을 이끌어 가고 있던 일심저축계에 하북 농협 지도부장이 참석하여 일심저축계의 성장 과정을 보고 칭찬과 격려를 하면서 그들에게 최대한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날 회원 전원이 농협공제에 가입하고, 농협에서도 〈새농민지〉도 매월 보내주고 긴밀한 유대를 만들어 나갔다.
일심저축계에서는 마을 서편에 5만평의 밭이 나와 있었는데 앞으로 모두 매입키로 결정하고 우선 4필지 2000평을 계금과 농협대출금으로 매입하였다. 그 밭에 콩을 심어 5,6월 공동 작업으로 풍년 농사를 지어 제법 수익을 본 덕분에 2,3년 동안 꾸준히 계금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1978년경, 기름파동으로 경제적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불안하고 어두워졌다. 농촌경기도 따라서 그 영향을 받아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가면서 일심저축회는 처음 계가 만들어졌을 때보다 다소 그 활기참을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1976년부터 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를 맞아 집집마다 경운기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게 되니 예전의 품앗이, 두레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일심회의 탈곡사업도 대중화가 되어, 너도나도 개인적으로 탈곡사업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 그들이 벌어들이는 이익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이양기와 추수기, 콤바인 등의 대량보급으로 기계화영농이 정착함에 따라 일심계의 운영도 새로운 방향으로 태어나야 할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원 가입의 증가와 계금의 증가는 여전히 일심회가 축소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 이후 1987년 11월 24일 2000평의 밭을 팔아 농기계 보관창고용으로 지산리 505-3번지 폐가 67평을 매입하고, 나머지 돈으로 논 1200평을 매입하여 농사를 지어 수익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80년대 중반기를 거치면서 전자동영농화가 이루어지고 농촌의 일손은 부족하고 도시의 공장으로 인력은 집중되니 1200평도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그대로 두고, 전자동 탈곡기 한 대와 콤바인 한 대가 있으나 대형콤바인에 밀려 일거리가 없어졌다.
수차례의 회의 끝에 일심회는 논 3966.96m²을 3.3058m²당 10,000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또한 옛 농기계 창고로 사용해오는 집을 헐고 새집을 짓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어서 1994년 12월 28일 지산일심저축계를 지산일심저축회로 개명하여 등기한 후 1995년 3월 3일 건물 착공신고서를 접수시켜 1995년 5월에 지산일심저축회 명의의 현대식 주택이 준공되었다. 이 주택은 지산일심회의 재산 목록에 들어가 있으며 현재 한 달에 15만원씩 세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지산일심회는 콤바인 1대, 전자동 탈곡기 1대, 경운기 8마력 1대 등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부터는 연중행사로 여름철과 추수기에 그 동안의 일을 토론하는 회의를 열어 농사전반에 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대책을 강구하는 총회를 열어 마무리를 해오고 있다.
지금도 지산마을의 전 회원들은 새로운 활력소를 찾기 위하여 고심하고 있다. 36년 전 허허벌판 무에서 출발한 22명의 회원들은 그 어려웠던 보릿고개를 함께 넘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마을입구까지 2차선 대로가 생겨 버스가 다니고 집집마다 자가용이 넘나드는 길을 닦아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