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B03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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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원대 |
마을에 사는 정인근(75세) 씨는 오랫동안 중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임을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다. 정씨 부부를 처음 만나러 갈 때 고희를 훌쩍 넘긴 촌부의 모습을 상상하고 갔으나 전혀 예상 밖으로 품위 있게 곱게 늙으신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부부의 얼굴에는 농촌의 빛이 제대로 내려앉지 않은 듯 했다.
▶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을속의 6·25전쟁
1950년 정인근 씨가 보광중학교 2학년일 때 6·25가 발발했다. 어느 날 많은 군용 트럭이 학교로 와서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키가 큰 학생들을 모두 태워 양산초등학교로 데려가서 자원입대원서를 작성케 한 뒤 귀가 조치했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서를 쓴 아이들은 모두 군대로 끌려갔다. 그러나 정인근(75세) 씨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학도병으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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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중학교
그 당시 야트막한 동산 바로 너머에 있는 통도사는 승려들을 소개시킨 뒤 31대 육군병원 제2병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제1병동은 부산 범어사에 들어섰다). 경내에 있는 화장장에서는 화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종일 인육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찰의 한 건물에서 입영하지 않은 아이들이 모여 학업을 계속했다. 이쪽 구석에서는 1학년, 저쪽 구석에서는 2학년, 나머지 두 구석은 3학년과 교무실이었다.
영축산은 산이 깊어 지리산 다음으로 무장 공비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과의 교전으로 밤낮없이 지척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밤이 되면 잦아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렸다. 어떤 때는 총알이 마루 밑에까지 날아 들어왔다.
주변에서 인명 피해가 생겨났다. 고모부 내외께서 방어진에서 사셨는데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광복 이틀 전에 이곳으로 왔다. 어선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던 고모부는 이곳 상황을 잘 몰랐던 탓에 주변의 권유로 덜컥 대한청년단 단장을 떠맡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일 먼저 공비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끝내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또 일제강점기 때 면사무소에서 배급담당공무원을 했던 이가 저들의 손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인명 피해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식량 약탈이 끝나기 무섭게 아군의 공격이 두려워 서둘러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민들은 밤마다 공비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정씨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 농사와의 인연
부산 피난 시절, 원예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할 무렵에 경상대 농과대학이 생기면서 이 학교 교사들이 대거 교수로 발령받아 가게 되었고, 이 분들의 권유로 농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농과대학을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순을 넘겨 새로이 시작한 농사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애초에는 도대체 무엇을 경작해야 할 지 몰라 4천㎡의 밭을 묵히려고도 했다. 그런데 봄이 되어 이웃에서 경작을 시작하자 그대로 있다가는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게 생겼기에 품을 주고 일손을 사서 이웃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작물을 재배했다.
요령이 좀 생기자 일손이 적게 가는 감나무를 심고 그 밑에는 고추·채소·콩 따위를 경작했다. 이론과 실제가 상충될 때도 있었지만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확고한 신념 하나로 정성을 쏟은 결과 남들보다 낫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만족할 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경운기는 자동차와 사정이 달랐다. 자동차는 어떤 길에서든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른쪽으로 가주지만, 경운기는 오르막에서는 자동차처럼 되지만 내리막에서는 반대로 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동차만 운전해 왔던 정씨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경우를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논 일곱 마지기(4600㎡) 전부가 5분 거리의 바로 집 앞에 있는데, 문제는 그곳이 통도사 경내에 해당하기 때문에 울타리가 처져 있어 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면 30분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정씨로서는 통도사라는 거대한 사찰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의 한 부분에 덮인 경우다.
▶ 가족 이야기
정씨에게는 아흔 다섯의 노모가 생존해 계신다. 젊었을 적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처음에는 무릎 연골이 닳아 걷질 못하다가 수년전부터 아예 하반신 전부를 못 쓰신다. 정신도 가끔씩 놓아버려 엉뚱한 말을 하신다. 치매 초기인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한사코 부끄러워하여 수발은 전적으로 일흔을 넘긴 며느리의 몫이다. 발병 초기에는 음식 조절을 않고 양껏 드시게 했더니 하루에 세 번씩 대변을 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는 늘 배설물 냄새가 가시질 않기에 손님이 찾아오면 미안해서 집으로 모시지 않고 항상 이웃집으로 모신다.
당신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반드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칠순의 며느리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수발이다. 그래도 다섯 살 유치원생 다루듯 달래고 위로하다 때로는 겁을 주기도 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봉양을 했다.
부인 김춘자(71세) 씨는 2007년 10월 10일에 사단법인 대한노인회(회장 안필준)와 사회복지재단 현죽재단(이사장 서원석)으로부터 효행상을 수상했다.
얼마 안 되는 상금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불편을 끼친 가족·이웃들에게 한턱내는데 모두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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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