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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311
한자 鄭嶷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미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614년 - 정억 효자문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28년 - 정억 추가로 정려됨
사당|배향지 정억 사당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정려각 정억 정려각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영일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정억(鄭嶷)의 본관은 영일(迎日). 고조는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 정이휘(鄭以揮)이며, 증조는 직장(直長) 정차순(鄭次諄), 조부는 참봉(參奉) 정호(鄭灝)이다. 아버지 어모장군(禦侮將軍) 정경희(鄭景禧)이며, 어머니는 고령 김씨(高靈 金氏)로 김명견(金命堅)의 딸이다. 아우 정잠(鄭岑)도 지극한 효성으로 정려되었다.

[활동 사항]

정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써 채소와 육포 등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항상 어버이 상에 올렸으며, 성장하여서는 더욱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다. 날이 저물면 허락 없이는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어버이 친구를 어버이 섬기듯 하니 어버이가 매우 흡족해 하셨다.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애간장을 태우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어버이가 이질을 앓자 병의 얕고 깊음은 대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면 안다고 하며 아버지의 대변을 핥아 맛이 쓸 때는 잠시라도 기쁜 얼굴을 하며 안심하였다. 또한 겨울철에 잉어를 드시길 원하여 개울가에 샅샅이 뒤지며 눈물을 흘리니 갑자기 한 자나 되는 잉어 한 쌍이 튀어나와 상에 올리니 병환에 차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웃집에 불이 나서 집의 뜨락까지 번지자 정억은 머리를 숙여 땅에 대고 하늘을 향해 절을 하며 통곡하여 불효를 용서 빌며, “병든 어버이를 어디로 모셔야 합니까?” 하며 애걸하니 잠시 후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어 불이 꺼져 버렸다. 아버지 상을 당해 식음을 전폐하고 기절하였다 깨어나길 네 차례나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란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례를 행하니 왜군도 손을 맞잡고 경의를 표하고는 떠났으며, 호랑이도 감응하여 여막 앞에 노루를 잡아다 놓기도 하였다.

아우 정잠(鄭岑)의 효행 또한 형에 못지않아 주위에서는 유검루와 왕상에 비유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이 지은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614년(광해군 6)에 정표(旌表)하였으며 세금호세(稅金戶稅)가 면제되었도 1628년(인조 6) 새롭게 정표(旌表)하였다. 현재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에 정려각과 사당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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