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32
한자 金華元
영어공식명칭 Kim Hwawon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 5월 6일연표보기 - 김화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김화원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8년 1월 30일연표보기 - 김화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김화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275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지도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화원(金華元)은 1864년 5월 6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275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권상호(權相鎬)·박의락(朴義洛) 등이 주도하여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월 19일 영해면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영양(英陽) 사람 이종구(李鍾龜)는 3월 19일 창수면 오촌동·삼계동의 주민 수십 명과 함께 영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고자 영해로 출발하였다. 길상동과 신리동의 주민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영해로 향하였다. 주민들이 신기동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신기동 주민들은 영해로 떠난 후였다. 결국 시간이 촉박하여 영해행을 중단하고 창수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창수동에서는 방가동 구장 이수각(李壽珏)이 아들 이학술(李學述)와 김금석(金錦石) 등과 함께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한 집에 한 명씩 나오라!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집을 불태우겠다!”, “만세 군중이 신리동까지 왔다. 서둘러 창수로 가서 만세를 부르라!” 말하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김화원을 비롯해 김상준(金尙俊)·맹학근(孟學根)·나성운(羅星雲) 등 수십 명이 동참하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약 200명의 군중들이 집결하면서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몽둥이를 휴대한 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향하였다. 권덕명(權德明)·김재수(金在守) 등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주재소를 파괴하라 외쳤다. 김화원을 비롯해 군중들이 주재소로 들어가 만세를 고창하였다. 군중들이 주재소에서 일경의 대검을 탈취하려고 하자, 순사와 순사보들이 도주해 주재소가 비게 되었다. 그러자 이현설·이수각 등의 지휘 하에 군중들이 주재소 건물·창·벽 등을 파괴하고 서류·장부·공문서·서적 등을 찢거나 사무실 밖으로 내던졌다. 이때 김화원맹학근·나재성·남출이·김대지·김도치 등과 함께 주재소 사무실로 들어가 서류·장부·공문서 등을 찢어버리거나 파기하였다. 오후 7시경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귀가하기 위해 창수교에 이르렀다. 여기서 일경들이 소유물을 사전에 보관해 둔 사실을 알게 된 약 30명의 군중들은 뒤돌아가 오용이(吳龍伊)·박석문(朴石文)·이강복(李康福)의 집을 습격하여 일경들이 숨겨둔 물건들을 찾아 파손시켰다.

창수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김화원도 체포되어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를 제기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