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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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玏 |
영어공식명칭 | Kim Reuk |
이칭/별칭 | 희옥(希玉),백암(柏巖),민절(敏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희근 |
[정의]
조선 전기 영월군수를 역임한 문관.
[가계]
김륵(金玏)[1540~1616]의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만칭(金萬秤)이고,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김우(金佑)이다. 아버지는 김사명(金士明)이고, 어머니는 장응신(張應臣)의 딸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큰아버지인 형조원외랑 김사문(金士文)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김륵은 1540년(중종 35)에 태어났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8년 검열·전적·예조원외랑을 거쳐서 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었고, 1581년 부수찬·지평·직강이 되었다.
1584년 김륵이 영월군수로 부임하였을 당시 전임 군수들이 부임하자마자 사망하는 변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김륵은 노산군(魯山君)[단종(端宗)]의 묘를 배알한 뒤 제청(祭廳), 재실(齋室), 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변을 막았다. 영월군수 재임 당시 「영월군진폐소(寧越郡陳弊疏)」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영월의 열악한 상황을 낱낱이 밝히고 시급히 구휼해야 한다고 건의했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다.
김륵은 1587년 영월군수 임기를 마치고 교리에 등용되었으며,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안집사(慶尙道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선비들에게 조정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독려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김륵은 1599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이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한 제방을 수축하여 후세에도 칭송을 받았다.
김륵은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죄가 있는 듯이 꾸며 내어 그 죄를 다스림]에 연루되어 강릉에 유배당하였다가 풀려났으며, 1616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륵의 저술로는 『백암집(栢巖集)』 6권 5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륵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민절(敏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 있는 구산서원(龜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