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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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俊民 |
영어공식명칭 | Lee Junmin |
이칭/별칭 | 자수(子修),신암(新菴),효익(孝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희근 |
[정의]
조선 전기 영월군수를 역임한 문관.
[가계]
이준민(李俊民)[1524~1590]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건(李楗)이고, 할아버지는 이정윤(李貞胤)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공량(李公亮)이며, 어머니는 조언형(曺彦亨)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정백거(鄭伯渠)의 딸 초계정씨(草溪鄭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윤기(尹機)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이준민은 1524년(중종 19)에 태어났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1554년 이준민은 사간원정언으로 재직 중 공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文風)을 경계하고, 경학(經學)을 중시하여 덕행을 권장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556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557년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는 권신인 이량(李樑)에게 의부(倚附)하여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탄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준민은 1558년 영월군수로 부임하였고, 1561년에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지만 관할 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이후 세자시강원의 문학으로 발탁되어 세자 교육에 힘쓰다가 1564년에 강계부사로 부임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이준민은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와 공조참판을 거쳐 157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준민은 오랫동안 북방에서 근무하여 국방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재임 중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뒤 이준민은 내직으로 옮겨 병조판서·지의금부사·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조정의 공론이 분열하여 동인과 서인의 붕당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를 염려한 이준민은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하고 따랐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한 뒤 당인들이 이이를 탄핵하고자 할 때, 이준민은 단호하게 맞서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날로 격화되는 붕당 다툼에 실망한 이준민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칩거하다가 1590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준민은 1698년(숙종 24년) 효익(孝翼)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현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314-2에 있는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