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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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夏望 |
영어공식명칭 | Jo Hamang |
이칭/별칭 | 아중(雅仲),서주(西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희근 |
[정의]
조선 후기 영월부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조하망(曺夏望)[1682~1747]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아중(雅仲), 호는 서주(西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조문수(曺文秀)이고, 할아버지는 참판 조한영(曺漢英)이다. 아버지는 금구현령을 지낸 조헌주(曺憲周)이고,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일상(李一相)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활동 사항]
조하망은 1682년(숙종 8)에 태어났다. 1711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722년(경종 2)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그 뒤 음직(蔭職)으로 사직서 및 장흥고의 직장, 의영고주부, 공조좌랑, 의령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의령현감 재직 중 정사를 잘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736년(영조 12) 조하망은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어 1739년 승정원승지가 되었고, 1741년에 사간원대사간에 올랐다. 1742년부터 1744년까지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조하망은 경포대를 중수하고 상량문을 지어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조하망은 1746년 영월부사로 부임하였고, 영월부사 재임 중 낙화암(落花巖)을 창렬암(彰烈巖)으로 고쳐 단종(端宗) 시녀들의 충절을 기렸다. 단종이 사망한 뒤 시녀들이 금장강(錦障江)에 투신한 곳을 고을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부르고 단을 설치하여 시녀들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조하망은 1747년 병이 들어 영월부사에서 물러난 뒤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하망의 저술로는 시(詩)·소(疎)·서(書) 등을 수록한 문집인 『서주집(西州集)』 8권 4책이 있다.
[묘소]
조하망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송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