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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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哀曲, 重調歌談 寧越斷膓曲 |
영어공식명칭 | The Sad Song Of King Danjong, Jungjo-Gadam, Song Of Breaking The Intestines In Yeongwol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낙현 |
[정의]
강원도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던 단종의 애사를 창연 형식으로 창작하여 1935년에 발표한 극작가 현철의 작품.
[개설]
「단종애곡(端宗哀曲), 중조가담(重調歌談) 「영월단장곡(寧越斷膓曲)」」은 1935년 12월 1일 『삼천리』 제7권 제11호 143쪽부터 149쪽에 걸쳐 수록된 글이다. 현철(玄哲)[1891~1965, 본명 현희운(玄僖運), 필명 현당(玄堂)]이 원작을 만들고, 단종(端宗)[1441~1457]의 유배 과정과 그 애사를 가담(歌談) 형식으로 창연한 문학작품이다. 「단종애곡, 중조가담 「영월단장곡」」은 단종의 이야기를 해설과 인물들의 대사에 창(唱)을 가미한 대본이다. 작가 현철은 스스로 창연이라고 불렀다.「단종애곡, 중조가담 「영월단장곡」」은 당시 식민지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서사였던 단종 애사(哀史)를 활용한 공연인데, 대본에 ‘단종애곡’이라는 명칭을 붙여 가담의 형식적 특성을 가시화한 작품이다.
[구성]
「단종애곡, 중조가담 「영월단장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상왕[단종]과 옥희의 대화로 이루어졌으며, 후반부는 단종의 조부인 세종(世宗)[1397~1450]과 중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상왕[단종]은 겨우 열두 살에 대통을 이어 왕위에 올라 세종대왕의 대업을 계승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려 하였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의 야심과 간신배들의 결탁으로 수많은 충신들을 모두 잃고 하루아침에 왕위까지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귀양를 왔다고 옥희에게 말한다. 이에 대하여 옥희는 단종에게 너무 심려하지 말고 아직도 충신들이 많으니 좋은 시절이 돌아올 때까지 옥체를 보존하라고 청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창연자는 성군이었던 세종의 한글 창제의 대업을 칭송하면서 단종은 세종의 손자이며 문종(文宗)[1414~1452]의 아들이라고 해설한다. 또한 창연자는 세종은 17명의 아들과 2명의 공주, 2명의 옹주 등 모두 21남매를 두었다고 해설한다. 이 중에서 단종의 부친인 문종은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서 모든 정사나 종친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형제들에게는 우애가 많았다고 평가한다.
한편 세종은 형제들 중에서 유난히 몸이 약하였던 문종과 문종의 아들인 어린 원손[훗날 단종]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중전에게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기강이 매우 강하니 훗날이 염려된다고 말한다. 이에 중전은 세종에게 수양도 사리분별을 할 줄 알며, 또 학식이 으뜸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원손을 보필하여 줄 것을 당부하면 훗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위로한다.
창연자는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도 수반인 정인지(鄭麟趾)[1396~1478], 신숙주(申叔舟)[1417~1475] 등에게 원손의 후사를 특별히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단종이 열 살이 되던 해, 세종이 승하하고 뒤이어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못 되어 승하하였다고 창연자는 설명한다.
[특징]
「단종애곡, 중조가담 「영월단장곡」」은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의 비탄 어린 목소리를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의 여러 역할을 창연자가 1인 다역을 통하여 창으로 표현한다. 사이사이 해설을 넣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담 공연의 특색이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