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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서도마을에는 400여 년 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어업노동요로 「거문도뱃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고기잡이를 나갈 때부터 만선하여 돌아올 때 까지 다섯 구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업에 따라 노래가 다르다. 제1절은 고기를 잡으러 떠나기 전 고사를 지내면서 부르는 「고사소리」이다. 이 소리는 주문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고, 제2절은 어장터로 노를 저어 가면서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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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마을이 농촌 지역 배후 도시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소라면 일대에 간척 사업이 이루어져 대단위 농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수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덕양마을 부근은 평지보다는 산이 많고,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 입구 해안가는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덕양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나 갯벌에 나가 어패류를 채취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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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여수팔경’이니 ‘거문도 삼호팔경(三湖八景)’이라고 하는 형승지가 예로부터 전래되고 있을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여수반도에서 남쪽으로 103㎞ 정도 떨어져 있는 거문도 서도마을에는 거문도의 삼호팔경 중 오경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시 교동 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두 차례 ‘오가고호(13:40 출항)’와 ‘거문도 사랑호(18:20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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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했던 덕양마을이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 여수-광주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덕양역이 설치되고 1933년 면 소재지가 옮겨오면서부터이다. 덕양은 이때부터 소라면의 중심지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로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소라면에는 일제강점기 때 바다를 막아 조성한 농토가 있었는데 복산간척지가 446,283㎡, 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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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시외버스정류장에서 장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가보면 좌우로 식당 간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이 유명한 덕양곱창 식당가이다. 이 식당가에서는 음식 가격이 1인분에 소곱창전골 7,000원, 돼지곱창전골 5,000원, 새끼보 7,000원으로 매우 저렴한 편이다. 평일에도 덕양곱창 식당가를 찾는 손님 차량들이 시장터와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고, 식당 안에는 곱창전골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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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역 앞에 너른 광장과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이 덕양장터이다. 오일장의 기능이 사라진 지가 10여 년이 되서 그런지 시장터의 흔적이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장터에 있는 식당 간판들은 밝고 활기차 보이고, 식당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식당 입구에는 큰 고무통 안에 돼지 곱창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냄새를 없애기 위해 종업들이 물로 씻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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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장터 는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과 화양면 일대에서 농산물을 내다 팔거나 농기구나 일용품을 사기 위하여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 당시에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덕양장터나 덕양역까지 오려면 농촌 지역에서는 지게에 짐을 지고 걸어와야 했다. 특히 소 거래는 새벽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장에 나온 사람들은 아침을 해결해야 했고, 장터에 일 보러 온 사람들은 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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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이라고 하면 행정구역상 덕양리에 속해 있는 상세동·하세동·삼거리·성재·통천·가장·흙산·내기·덕곡·가산·중승골 등 11개의 자연마을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 덕양역과 삼거리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네 개의 마을을 말하기도 한다. 네 개의 마을을 덕양이라고 한정한 것은 당초 한 개의 마을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주변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네 개 마을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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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도시에서 생활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도심은 삭막하고 농어촌 지역은 옛 정취를 느낄 수는 있지만 적막하다고 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이든 사람들이 삶의 질이 높아지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덕양과 돌산읍 군내리를 예로 많이 든다. 그래서인지 덕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따라 여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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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에서 요즈음처럼 하루 세 끼 걱정 없이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존해 있는 노인들 말에 의하면 정말로 먹기 위해서 살았다고들 한다. 노인들이 기억하는 어려운 시기는, 물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본래 한국 농촌 경제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소수의 지주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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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행정의 치소가 그 지역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교육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행정의 치소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게 마련이다. 1897년 5월 여수군이 설군되었을 당시에는 면 소재지가 덕양에서 남쪽 방향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 지금의 관기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설군 당시 면 소재지였던 관기리에서 떨어져 있었던 지금의 덕양 일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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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곱창 식당이 몰려 있는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시장 터 2층 슬라브 건물의 아래층에는 덕양2구 경로당이 있다. 이 경로당에는 70~90세 되는 할머니들이 매일 모여서 소일하고 있었다. 먼 객지에서 와서 덕양에서 오랫동안 사신 할머니를 찾으니 금년(2008년) 90세 되는 두 할머니를 가리켰다. 한 할머니는 화양면 출신 90세 진종심 할머니와 동갑인 해주 출신 허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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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에서 동쪽 방향으로 24㎞ 떨어진 백도는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무인절경의 섬이다. 동력선이 나오기 전에는 서도 사람들은 돛단배를 타고 이 섬으로 고기잡이하러 나간다. 마을로 돌아올 때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가 햇살에 비칠 때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거문도 출신의 유학자 김유(金瀏)[1814~1884]가 지은 『귤은재집(橘隱齋集)』에 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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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는 조선이 1883년 영국과 조영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지 2년이 지난 1885년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영국군의 무단점거였지만 조선의 다른 지역보다는 가장 먼저 영국과 접촉이 되었던 곳이다. 영국이 1885년부터 1887년까지 2년 동안 점거하는 동안 거문도에 있는 마을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게 된다. 어느 날 마을사람들은 일요일에 술을 마시고 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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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마을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3구이다. 덕양마을은 마을의 중심부를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있는데, 화양면 방면으로 연결되는 국가지원지방도 22호선이 국도 17호선과 연결되는 도로와 이 마을에서 갈라지는데 바로 이곳이 삼거리이다. 삼거리란 마을의 명칭도 예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삼거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생된 명칭이 마을 이름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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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3구 삼거리마을에는 삼일면 낙포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1977년부터 삼일면 낙포리에 남해화학공장이 조성되면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마을이 해체되자 600여 세대가 집단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여천출장소에서는 집단 이주할 장소로 안산동을 권하였으나 그곳은 택지 분양가가 높은데다 보상받은 금액으로는 분양받기도 어려웠다.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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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의 덕양 시내에는 네 개의 마을이 있는데 이 중 상세동과 하세동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 국도 17호선을 따라 여수공항을 거쳐 오른쪽 방향 지방도로로 진입하게 되면 덕양거리가 나온다. 덕양거리 양쪽에 상가가 연이어 있는데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경계로 오른쪽, 즉 지도상으로 보면 서쪽에 해당되는 곳이 상세동이고 건너편 마을이 하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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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마을에는 다른 면 소재지와 달리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소라초등학교는 1921년 6월 20일 개교한 소라공립보통학교의 후신으로 당시 여수군 내에서는 여수서정보통학교와 여수동보통학교 그리고 돌산초등학교에 이어 네 번째로 생겼다. 도로변 학교 교정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큰 히말라시다가 여러 그루가 심어져 있어 일제 때 건립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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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소재지인 덕양에서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상세동과 하세동 사이의 간선도로를 걸어가면 장터 입구에 허름한 슬라브 2층 건물이 있는데, 소라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막걸리 주조장이다. 아직도 건물에는 지을 당시에 외벽에 붙였던 타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을 당시에는 고급스런 건물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지금은 막걸리가 소주나 맥주에 밀려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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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노동 관행 중의 하나였으나 서도마을에는 소매 품앗이란 것이 있었다. 품앗이란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로, 일시적으로 집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어촌지역에서 많이 행해졌다. 노동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농촌 지역에서의 모내기, 김매기, 밭갈이, 어로 활동 등은 이웃간에 품앗이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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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막걸리는 관혼상제나 잔치 또는 노동 때 사용하는 술이었다. 웬만한 농가나 주막에서는 수수나 보리로 막걸리를 빚어 먹거나 파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반 가정에서 술을 제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한말의 주조업을 중요한 재원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1909년 「주세법」을 공포하여 주조 면허제를 시행하면서 주조업의 규모화·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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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돌산군이 설치되고 1897년 5월 여수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순천부에 속해 있었다. 순천부에 속해 있을 당시 여수 방면의 도로는 순천부에서 여수 방향 16㎞ 지점에 성생원[율촌면 소재], 24㎞ 지점에 무상원[쌍봉역], 32㎞ 지점에 내례원[국동 지역]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3개의 역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수에는 세 갈래의 간선도로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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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서도마을에 구전되는 어업노동요의 하나로 술비소리가 있다. 어로 활동이 많은 서도마을에서는 그물을 당길 때, 떼배통을 만들 때 등 여러 가지 용도로 튼튼한 밧줄이 필요하다. 밧줄은 칡넝굴을 산에서 베어와 바닷가에서 줄을 꼬면서 만들기 때문에 힘들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일의 고달픔을 잊고 능률을 높이기 위해 부른 노동요가 술비소리이다. 술비란 용어의 ‘술’은 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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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마을은 바다와 인접해져 있는데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마을의 돌담 바로 아래까지 이르고 파도가 치노라면 돌담까지 바닷물이 넘나들 정도이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태풍과 비바람 치는 날이 많아서 가옥과 밭 주변에 폭이 넓은 돌담들이 많은 것은 바람으로부터 가옥과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겹으로 올려진 돌담 속의 음지는 햇빛이 차단되어 습기가 많아 모기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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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소라면사무소에서 덕양시외버스정류장을 조금 지나 도로변 좌측 편에 바위산이 있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역의암을 물으니 들어보기는 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설이 있는 바위였지만 주변의 지형이 변해서 그런지 전설의 형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역의암 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정종순 할머니는 역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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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하세동 경로당에 가서 옛날 결혼했던 이야기와 신혼 생활에 대해서 물으니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면서 다른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세 많은 분들은 기억이 가물거리고 덜 드신 분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가마 타고 시집갔지. 무슨 놈의 신혼 생활. 매일 일만 하다가 살았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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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마을 앞바다에서 해안을 따라 뱃길로 섬 둘레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마을 뒤편 남서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가면 음달산 자락과 바다가 만나는 해안가에 아름다운 형상을 가진 기암절벽이 많다. 이곳에서 남쪽 방향으로 조금 가면 해변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바위 정상에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둘레 80m, 깊이 6m 크기의 연못이 있다. 서도에서는 이 연못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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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 중의 하나인 이곡명사(梨谷明沙)는 서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해변가 뱃골을 말한다. 뱃골이란 배가 계곡 사이로 다니는 데서 유래한 지명(또는 골짜기에 돌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이다. 그런데 뱃골이 먹는 배로 해석되어 ‘이곡(梨谷)’으로 표현된 것이다. 뱃골 해변은 수정과 같이 맑은 바다와 하얀 모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거문도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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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삼짇날은 산과 들에 꽃이 피고,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시기이다. 이때가 되면 일손이 바쁜 농어촌에서는 일손을 잠시 멈추고 진달래꽃을 뜯어다 쌀가루에 반죽한 꽃지짐을 지져 먹기도 하고 경치가 좋은 산이나 물가에 가서 화전(花煎)놀이를 한다. 이 화전놀이는 봄이 완연한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성행했던 집단놀이 중의 하나이다. 여수반도 남단에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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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덕양거리에는 벚나무가 보이지 않으나 예전에는 많았다. 일제시대에 덕양거리에 벚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 초창기 일본인들이 덕양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덕양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벚나무를 직접 심었는지 아니면 마을사람이나 또는 동원된 학생들이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직간접적으로 일본인들이 벚나무를 심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설에 의하면 소라공립보통학교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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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농어촌 지역에서는 식량이나 생활용품을 거의 자급자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체적으로 생산이 어렵거나 필요한 물품은 봇짐장사로부터 구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생산자에게 주문하여 사용했다. 수요와 공급이 그다지 많지 않은 농촌 지역에서 장터가 형성될 수가 없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골 마을인 이곳에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개화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여수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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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와 가까운 화양면과 삼일면은 바다와 접하고 있어서 뱃길 외에는 다른 지역과 교류하기가 어려웠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뱃길로 여수장이나 광양장으로 나가야 했다. 이것은 여수반도가 예로부터 육상보다는 해상 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내륙 지역까지 도로가 개설되고 육상 교통이 서서히 발달해지면서 뱃길로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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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승골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6구이다. 2008년 3월 현재 230세대에 564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1998년 12월 31일 기준 인구와 대비하면 61명이 감소하였다. 중승골은 덕양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세동과 하세동이 도로변 상가와 접하고 있는 데 반해 중승골은 덕양에서는 외곽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관할은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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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남녀 간에 구분이 있는 유교질서가 아직 남아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유습은 도시보다는 농어촌 지역에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서도마을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처녀 총각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육지와 거리가 멀고 교류 범위가 거문도라는 섬의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도마을의 연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대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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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고 나서 한반도 통치와 대륙 진출을 위하여 남해안 주요 항구로부터 북으로 연결되는 철도를 부설하게 된다. 1905년 개통된 부산-서울 구간인 경부선을 비롯하여 1914년 개통된 목포-서울 구간인 호남선, 1930년 개통된 여수-광주 구간인 경전서부선 그리고 1936년 순천-이리 구간인 전라선 등이 개설되었다. 덕양 에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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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 국도 17호선 따라 여수 방향으로 내려오면 여수공항을 거쳐 오른쪽 방향으로 진입하는 지방도가 있다. 이 도로로 진입하게 되면 도로 양쪽에 상가가 연이어 있다. 좌측에 덕양시외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정류장 뒤편에 덕양역과 덕양장터가 있고 좌측편으로 상가와 공공시설물이 연이어 있는 곳이 바로 덕양리 하세동이다. 원래 이곳은 대포간척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도로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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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에 장이 개설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터가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오일장은 1·6, 2·7, 3·8, 4·9, 5·10과 같이 매월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개시되는 정기시의 성격을 가졌다. 덕양장도 열흘에 두 번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덕양의 오일장이 일회적·불규칙적 시장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오일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덕양은 상품의 공급과 수요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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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을 무렵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하세동 경로당 옆을 유병길 할머니가 농기구를 유모차에 싣고 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시냐’고 물었더니 대뜸 ‘오늘도 밭에 가서 일해야 한다.’며 대답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요즈음은 행상 안하시냐고 했더니 행상 안한 지가 몇 년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 오랜만에 뵈었는데 경로당에 가서 행상했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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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마을에서 가까운 넓은 앞바다에는 고기잡이철이 되면 수백, 수십여 척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고기를 잡는다. 고기잡이배들은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갈치와 멸치 등을 그물로 유인하기 위하여 고깃배 위에 촉광이 높은 수많은 집어등을 켜게 되는데,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 고깃배들이 불야성을 이루게 되면서 넓은 바다가 휘황찬란한 광경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홍국의 고기잡이 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