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3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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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愍祠齋室重修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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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 이순신, 이명상 |
용도 | 사당 |
발급자 | 이명상 |
문화재 지정번호 | 해당사항 없음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민사의 중수기.
[제작 발급 경위]
충무공을 모신 충민사 묘문 밖에서 동서 제실을 아직 짓지 못하고, 다만 석천사의 승사(僧舍)를 대신 쓰고 있었는데, 숙종 36년에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忠愍公)이 여기에 재사를 창건하였으나,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사우가 황폐된 것이 많아, 재력을 모으고 그 터를 개척하여 담과 또 좌우 재사를 허술함이 없이 만들었는데, 그를 감동(監董)한 자는 박대복의 후손인 군관 박치장이었다. 그 재사(齋舍)가 이명상의 종형 때에 만들어 지고 이명상 때에 중수되어 그 전말을 써서 후에 전하기 위해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구성/내용]
재실중수기(齋室重修記)
충민사는 곧 우리 선조 충무공을 게건(揭虔)한 곳이다. 매세 춘추제향에 조가에서 향축을 주어 수령변장으로서 헌관을 차정하고 일방 장보가 다 와서 행사를 맡으니 그 숭봉하고 보새하는 법이 더 할 수 없는지라. 이에 묘문 밖에서 동서 제실을 아직 짓지 못하고 다만 승사(僧舍) 수 칸이 있을 따름이다. 매양 재숙 할 때에 당함에 문득 곤란함을 걱정했더니 숙묘(肅廟) 36년 기축에 5대손 충민공(忠愍公)이 여기에 출제하여, 비로소 새롭게 하고 또 재사를 창건하니 백여년 흠결의 제도가 이제와 완비한지라 상의 8년 임자(壬子)에 불초가 또 외람되게 여기에 오니 수십 년간에 한집 형제가 선조의 분용한 땅에 건절하니 가히 일진의 성사라고 할지라. 선조의 유택과 여위하고 혁혁하여 이목에 있어 어제의 일과 같은지라. 어제와 이제를 부앙함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 참을 깨닫지 못하겠도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사우의 백이 황폐된 것이 많고 재사가 거의 경비되었으니 예를 따라 수집함이 어찌 오늘을 기다림이 아닐까. 드디어 다음 겨울에 약간 재력을 모으고 그 터를 개척하여 동용을 바꾸고 고해와 원장과 또 좌우 재사가 일신 개관되니 이미 완전하고 이미 견고하고 사치함도 없고 허술함 없으며 그를 감동한 자는 군관인 박치장이다. 치장의 증조 대복이 옛적에 우리 선조를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국란을 같이하여 군용에 참여하였더니 또 이제 그 손자가 또 나를 도와 이 역사를 완공하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슬프다. 선조의 정충과 위적이 백사 상공의 기문에 있어 지금까지 미간을 비추니 가히 천억년을 썩지 아니할 것인즉 뒷사람의 취진한 필요가 없으나 또한 그 재사가 종형 때에 시건 되고 불초 때에 중수된 것이 가히 한말로 기실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이에 그 전말을 써서 후에 이어 수집할 자에 끼치노라.
숭정후 재계축 중동 상완 5대손 명상읍혈기
崇禎後 再癸丑 仲冬 上浣 五代孫 命祥泣血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