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3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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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承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여말 선초에 여수에서 무인으로 활동했던 인물.
[개설]
김승주의 처음 이름은 을보(乙寶)요, 호는 월담(月潭)이며 시호는 양경(襄景)이다. 여말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길로 나아가 왜구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변방을 지키는 데 주도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여수인(麗水人)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순천김씨 가문에서 편찬한 『순천김씨세적총람』에서는 그가 소백산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가계]
고려 1354년(공민왕 3) 정주목사(定州牧使) 김유정(金惟精)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아들이 있다.
[활동사항]
본래부터 얼굴빛이 검고 키가 컸던 그는 자랄수록 너그러운 성격에다가 힘이 장사였다. 병법과 글도 잘했다. 김승주는 1380년(우왕 6) 26세 되던 해에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에 임명되어 무인의 길을 걷는다. 이후 군기소윤(軍器少尹)과 풍주 수령을 거치면서 연변에 침범한 왜구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최영(崔塋) 장군과 깊은 교유를 하면서 변방을 지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을보는 조선 건국 후 병을 핑계로 칩거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다섯 차례나 불러 함경도로 나가 다시 벼슬길을 걸었다. 이후, 전중경(殿中卿), 의흥삼군부첨절제사(義興三軍府僉節制使), 형조전서(刑曹典書), 동북면(東北面) 찰리사(察理使) 등을 거치는 동안 야인을 퇴치하는 등 전공을 크게 떨쳤다. 내직으로 옮겨 호조와 이조의 전서(典書),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는데, 1400년(정조 2) 소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이듬해 태종을 등극케 한 공으로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의 부름을 받고 강계(江界)만호(萬戶) 등을 지내다 다시 내직으로 옮겨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임금 곁에서 소임을 다한 그는 가뭄이 들 때마다 왕명을 받아 기우제를 주관했는데 그 때마다 비가 내림으로 임금은 그에게 ‘비를 잇는다’는 뜻으로 승주(承霔)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이후부터 사명(賜名)으로 고쳐부르게 된다.
1406년(태종 5) 공조판서에 임명된 그는 왕명을 따라 종묘의 재궁(齋宮)을 짓는 일에 힘을 쏟다가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주요 요직을 거쳐 1409년 왕명을 받아 북방 야인을 퇴치하는 등 전공을 크게 세워, 임금은 1414년 여산군을 고쳐서 평양군(平壤君)으로 삼고 병조판서로 임명하는데 그는 도성을 튼튼히 하는 일에 매진을 한다.
[묘소]
경기도 광주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