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16 |
---|---|
한자 | 郭喜主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서정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곽희주(郭喜主)는 1903년 10월 2일 전라남도 여수시 서정동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목포의 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1년 11월, 『동아일보』 등을 통해 워싱턴회의[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 민족 대표자도 반드시 이 워싱턴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판단한 곽희주는 같은 달 13일 오후 4시쯤 천귀례·김나열·박음전·문복금·김연순·박복술·주유금·김옥실·김귀남·김자현·이남순 등 동교생 열두 명과 학교 기숙사에 모여서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방법으로 다음 날 14일 정오 오포(午砲)를 신호 삼아 각자 대한제국기를 휴대하고 교문을 나와 목포 시가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할 것을 협의하였다. 곽희주 등은 그날 정명여학교 기숙사에서 대한제국기 수십 매를 함께 제작하였다. 11월 14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 학생과 교사 등이 휴식 중인 정오에 오포가 울리자 곽희주 등 20명은 대한제국기를 손에 들고 정명여학교 정문을 나왔다. 이 가운데 열한 명은 각자 휴대한 대한제국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목포부 남교동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 사건으로 곽희주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23일 석방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곽희주의 공훈을 기리어 201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