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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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昌來 |
영어공식명칭 | Park Chang R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종길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7월 3일 - 박창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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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박창래 여수공립수산학교 독서회 회원으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1월 13일 - 박창래 사망 |
학교|수학지 | 여수공립수산학교 - 전라남도 여수시 국동 |
묘소 | 만성리 형제묘 -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창래는 1930년 3월 여수 지역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여수공립수산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활동 사항]
여수공립수산학교 독서회는 1930년 3월 여수 종고산 정상에서 열린 모임에서 발족했는데, 여수 지역의 청년 단체 중 항일 성격을 가진 주요한 단체였다. 박창래는 백인렬의 권유를 받아 여수공립수산학교 독서회에 가입하였다. 초기에는 백인렬 조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나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나자 5개조 중 정학조가 대표로 선임되었던 2조에서 활동하였다. 박창래는 김재곤 등과 같은 조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한반도 차별 정책과 식민지 교육에 불만을 품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했으며, 동료 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항일 투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9월 회원들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박창래도 다른 관련자들[총 22명]과 함께 구속 수감되었다. 이후 박창래는 이용기, 오놀보, 정학조, 곽재석, 김봉칠, 진자미, 김남호, 백인렬, 정보한, 조병호, 윤경현, 김재곤, 차용헌 등 13명과 함께 입건되었고, 1931년 9월 4일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제1조 제2항]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여순사건 이 일어나던 즈음인 1948년 화양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박창래는,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만성리 형제묘’에서 군경에게 희생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
박창래는 여순사건의 집단 학살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소재 만성리 형제묘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창래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