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0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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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鳥谷里公所 |
이칭/별칭 | 조곡공소,새실공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조곡길127-2[조곡리 394]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성준 |
설립 시기/일시 | 1950년대 - 조곡리공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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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90년 - 조곡리공소, 합덕 양촌본당 관할 편성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99년 - 조곡리공소, 합덕본당 관할 편성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7년 - 조곡리공소, 신례원성당 관할 편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대 - 조곡리공소의 전신인 오산리공소 설립 |
현 소재지 | 조곡리공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조곡길127-2[조곡리 394] |
성격 | 종교 기관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조곡리에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신례원성당 소속 공소.
[개설]
예산군 신암면 조곡길에 있는 공소로 천주교 박해 때 부터 내포 지역 천주교회 발전의 중요 역할을 맡았다.
[설립 목적]
1910년대 조곡리공소의 전신인 오산리[또는 오촌리]공소가 설립되었고, 1950년대 조곡리[새실]공소가 설립된 것은 박해시대부터 이어져 내려 온 신앙의 맥을 이어서 예산 신암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 위함이었다.
[변천]
조곡리는 1780년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이 내포 지역에 처음 천주교를 전파한 곳에 속한다. 충청 지역 최초로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나,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100년간 계속된 천주교 박해로 인해 이곳의 신자들 대부분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의 산골로 피신하였다.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로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된 후, 1890년 내포 최초로 간양골본당과 합덕 양촌본당이 세워졌을 때 조곡리 지역은 합덕 양촌본당 관할이 되었다. 1899년 양촌본당이 합덕으로 이전하여 합덕본당이 되자, 합덕 본당 관할이 되었다. 조곡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신암 ‘오산리공소’나 오가 ‘오촌리공소’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천주교 연말 통계에 나타난다. 이들 공소는 1927년 합덕본당에서 예산본당이 분할되자 예산본당 소속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50년대부터 조곡리공소가 드디어 연말 통계에 나타나는데, 오산리와 오촌리를 아울러 조곡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이다. 조곡리공소는 1977년 예산본당에서 신례원본당이 분할되자 신례원 성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곡리공소는 내포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한 보금자리 중 하나이다. 박해 시대에는 신앙의 근거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초기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교하며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하는 등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현황]
조곡리공소는 조곡리, 오산리, 별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여사울, 계촌리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뿌리가 깊은 공소이다. 1957년 아랫새실에 준공한 공소 건물은 외부는 소박하지만 수철리공소 건물처럼 내부가 경건한 멋을 지닌 목조 건축물이다. 지금은 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 보수 잘 안 되어서 많이 낡아 보이지만, 당시에 건물을 짓기 위해 조곡리 신자들은 윷놀이 대회 상금으로 저리(低利) 대부하기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신앙의 뿌리를 바탕으로 공소 출신 사제 1명과 3명의 수도자가 나왔다.
[의의와 평가]
조곡리공소는 이웃한 여사울공소와 함께 예산 신암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에 속하는 곳이었으며, 박해 시대의 전통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공소로, 현대에 와서도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