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388
한자 恭愍王蒙塵
영어의미역 King Kongmin's Evacu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몽진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361년 12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362년 1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관련인물/단체 공민왕

[정의]

1361년 12월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난한 사건.

[역사적 배경]

원명 교체의 격변기인 고려 후기에는 북로남왜(北虜南倭)로 불릴 만큼 홍건적과 왜구가 창궐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구성된 반란군으로 공민왕 즉위 무렵에 조직되었다. 만주로 진출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쫓기게 된 홍건적은 퇴로(退路)를 한반도로 잡아 1359년(공민왕 8)에 고려를 1차 침범하였다.

그 후 홍건적들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다시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10여 만 명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였다. 이때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남으로 피난길에 올라 12월 복주(福州, 안동)에 다다랐다.

[발단]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하게 된 것은 안동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이며, 해안 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왜구의 침입에도 안전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민왕의 피난을 수행한 인물 가운데 안동과 관련된 인물이 많았다. 이로 인해 물적·경제적 지원을 받기에도 다른 지역보다 유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과]

피난길에 나선 공민왕 일행은 1361년 11월, 개경을 떠나 파주-이천-음성-충주-조령을 거쳐 12월에 안동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기 직전, 다리가 없는 냇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어 왕비인 노국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놋다리밟기’란 민속놀이가 유래하였다. 안동의 토착 세력과 주민들의 적극적 지원에 감동한 공민왕은 백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의 귀중품을 내리고, 안기역의 역리에게도 유기잔구대 14개를 별도로 내려주었다.

[결과]

안동 주민들의 협조와 후원 아래 고려 조정은 안정을 되찾고,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을 수립하였다. 공민왕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하여 홍건적 토벌의 명을 내렸다.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 개경을 되찾자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인 1362년 1월에 상경 길에 올랐다. 상경 때에는 조령을 넘지 않고 상주를 거쳐 청주, 죽주, 파주로 해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의의와 평가]

중국 직례지(直隷地)에서 일어나 만주에 진출한 홍건적은 고려에 대한 2차례 침공으로 오히려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려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왔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으로 인해 안동 지역민들의 상경종사(上京從仕)가 늘어나고, 안동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와 유물이 남게 되었다. 공민왕은 안동 지방을 복주목에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공민왕영호루의 현판과 옛 안동군청 현관 입구에 걸려 있던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을 써서 내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