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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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일제식민기 안동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 말살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이었다. 일제가 시행한 정책이 비록 근대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을 뿐이다. 일제의 수탈 일변도 식민지 정책으로 안동 지역 농민들은 토지에서 내몰리고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안동 사람들은 줄기찬 항일 투쟁을 전개하며 한국 근대사의 주요 과제였던 민족 해방과 근대 국가 건설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행정제도]
1910년 조선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 행정 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에서 동리는 개별 농가의 한계를 보완하는 공동 조직이자 자치 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대체로 지역에서 명망 있는 계층의 주도 아래 운영되었다.
일제는 지역 명망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1914년의 군·면·동리 통폐합은 이러한 목표와 갚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안동군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변화를 겪어 예안군이 안동군에 합쳐지면서 모두 20면 194동리로 통합되었다.
1931년 4월 1일 안동면이 안동읍으로 승격하고 일부 면이 통폐합되어 1읍 15면 218동으로 개편되었다. 결론적으로 예안군이 안동군에 통합되고 기존의 공동체적 요소가 점차 사라지면서 식민 통치에 유리한 지방 체제로 굳어지게 되었다.
[교육제도]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조선교육령에는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하는 한편, 고등 교육·인문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여 정치의식의 성장을 막고 실업 교육만으로 통치에 순응하는 식민지 백성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교육 정책은 3·1운동의 영향으로 더욱 체계화되었다. 학생들이 민족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자 사립보통학교나 강습소·야학까지 통제하였고, 학교령을 반포하여 각 지역 사립학교의 재산과 교사 등을 공립학교 설립 재원으로 빼앗거나 폐교시켰다.
안동 지역에는 1907년 협동학교를 시작으로 1920년대까지 30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제의 교육 정책으로 공립학교에 흡수되었다. 예를 들면 협동학교는 임하·임동공립보통학교로, 선명학교는 예안공립보통학교로, 보문의숙은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오릉학술강습회는 풍북공립보통학교로, 노동서사는 풍서공립보통학교로 넘어갔다.
안동 지역 사립학교들이 모두 민족 교육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사립학교에서 성장한 인재들은 안동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안동 지역 민족 운동의 진원지로 성장하였던 학교들은 일제가 추진한 공교육에 흡수되어 점차 민족 운동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농업정책]
일제의 농업 정책은 당시 안동 인구의 82%가 농업을 생계 수단으로 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업 부문에서 일제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정책은 토지 조사 사업이었다.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본격적인 토지 수탈 작업에 들어갔다.
안동에서도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되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더불어 품종 개량 사업을 실시하여 벼는 일본인의 식량으로, 면화와 고치는 공업 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안동군의 경우 벼는 1920년도에 80%, 면화는 1925년에 100% 육지면으로 교체되었다. 이와 더불어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농업 단체를 조직함에 따라 안동에서는 1910년대에 지주조합·면작조합(1915)·양잠조합 등이 설립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일제의 수탈 정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수탈 정책의 골격을 이루는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산미 증식 계획이었다. 1920년 조선총독부는 제1차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면서 농사 단체를 통합하여 농사 개량 사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각종 산업 단체를 농회(農會)로 통합·정리해 나갔다.
안동군에서도 1920년 삼림조합·지주조합·양잠조합·면작조합을 통합하여 임의 단체 안동군농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일제는 1926년 제2차 산미 증식을 계획하면서 이를 뒷받침해 줄 더욱 강력한 통치 체제를 확립할 필요성에 따라 기존의 임의적인 군(郡)과 도(島)의 농회를 정비하여 농회의 계통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안동에서는 농회령이 발표되자 1926년 삼림조합을 제외한 지주조합·면작조합·양잠조합을 새롭게 정비하여 계통 체계 안동농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안동의 농민들은 농회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다 금융조합의 설립은 금융 수탈로 이어졌다. 결국 1920년대에 본격화된 식민지 농정은 농민층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의 식민 농정은 순 소작농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안동은 1917년 지주 0.8%, 자작농 13.4%, 자소작농 48.9%, 소작농 36.9%로 자소작농이 비교적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수탈 농정이 본격화된 1920년대를 거치면서 48.9%를 차지하고 있던 자소작농은 30%로 감소하고, 소작농은 51%로 급격한 증가를 보였다. 자소작농이 자작농과 소작농으로 분해하는 과정에서 1.6% 포인트가 자작농으로 상승한 반면, 14.1% 포인트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이는 전국이 1.2%, 경상북도 지역이 0.7% 포인트의 증가를 보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증가율이다. 이러한 현상은 안동의 미작 중심지인 풍산 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 미작 지대인 풍사면(豊四面)을 중심으로 지주와 소작농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이것은 1920년대 대규모 소작 투쟁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나 5,000여 명이나 되는 소작농의 참여를 이끌어 냈던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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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형태별 농가 계층 호수의 추이
자소작농의 변동은 농산물 가격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조선이 일제의 저렴한 식량·원료 공급지로 전락한 긴박한 상황에서 농산물 가격은 일반적으로 저가(低價)를 면치 못하였다. 농산물 가격이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자 결국 중간 계층인 자작농과 자소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낮은 농산물 가격이 지속되면서 소작농에게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결국 소작농들은 극빈농·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등지고 일본·간도 등으로 떠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안동의 농민들은 저항 의식을 키워 갔다. 양잠 농민들은 양잠 지정 판매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생산비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가격과 시세에 맞지 않는 잠종(蠶種) 대금을 내려 줄 것을 도(道) 당국에 진정하기도 하였다. 또 풍산소작인회와 같은 조직적인 소작 투쟁은 단순한 소작 투쟁에 머물지 않고 청년운동가나 사상 운동가들의 지도에 의해 빠르게 계급적·민족적 주체로 성장해 갔다.
[항일운동]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 민족은 반만 년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국권 회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을 날을 앞당기고자 노력하였다. 나아가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확보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당면 과제로 여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안동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지역보다도 치열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 항쟁으로 시작된 안동 항일운동의 주역은 유림들이었다. 그러나 3·1운동과 1920년대 이후의 대중 운동과 사회운동의 경험을 통하여 안동 지역 민중들의 민족의식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즉 안동의 지도층이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역사적인 책무를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모범 사례를 보여 주었다면, 일반 만중들에게는 계급적·민족적 주체로 성장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