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843
한자 安東張太師公城谷齋舍
영어음역 Andong Jangtaesagong Seonggokjaesa
영어의미역 Storage for Memorial Service for the Founder of Jang Cla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5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5년 12월 26일연표보기 -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경상북도 기념물 제15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성격 재사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1806년연표보기
정면칸수 누문 5칸|강당 5칸|동재 3칸|서재 4칸
측면칸수 누문 2칸|강당 2칸|동재 1칸 반|서재 1칸 반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511 지도보기
소유자 안동 장태사공 대종회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재사.

[개설]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삼태사의 한 사람인 안동장씨(安東張氏) 장정필(張貞弼)의 제단을 지키고 제사를 모시기 위한 집이다. 또 다른 삼태사로는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이 있다. 태조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정필을 각각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다.

1541년(중종 36) 태사묘(太師廟)가 건립되어 삼태사를 향사하였지만 김선평, 권행과 달리 장정필은 묘조차 확인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재사가 성립된 후 1842년(헌종 8) 무덤 발굴을 통해 ‘장정(張貞)’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지석(誌石) 조각을 찾아 묘를 증빙하였다고 한다.

[위치]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마을의 안쪽 깊은 곳에 야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있다.

[변천]

1806년(순조 6)에 건립되었고, 1853년(철종 4)에 중건하였다. 중건 당시의 “옛 터를 확장하고 제도를 크게 늘려 중앙 마루가 6칸, 동서 온돌방이 각각 2칸이고 좌우의 사랑채가 각각 4칸이고 주방과 창고가 6칸이었는데 합하면 24칸”이라는 기록과 현존 건물과는 잘 맞지 않아 그 후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에 영휘루(永輝樓)를 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형태]

튼 ‘口’자형을 이룬 재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왼쪽에 ‘口’자형 관리사가 서재의 오른쪽 배면과 연접하여 배치되어 있다. 영휘루 누문을 들어서면 마당 좌우에 서재·동재가 마주보고 있고, 건너편에 강당인 추원재(追遠齋)가 누문과 마주하고 있다. 누문 오른쪽에는 비교적 큰 연못이 조성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누문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향교 및 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큰 규모의 재사 형식은 보이지 않는데,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는 이런 형식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 예라 할 수 있다. 누문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로 5량가의 초익공계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재사 뒤쪽 북동쪽에는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재사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길가에는 신도비각과 각종 기념비가 배열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에 대청을 두었고, 그 양측에 각각 1칸씩의 온돌방을 놓았다. 대청의 정면은 개방하였고, 배면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대청과 양측 온돌방 사이에는 띠살 창호가 나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은 뒤 기둥을 세웠고, 5량가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고,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이며 민도리 형식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현황]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는 2005년 12월 26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안동 장태사공 대종회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중반에 중건한 재사에 20세기 중반 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누문이 더해지면서 전통적 분위기가 다소 흐트러졌지만 전체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는 향교 및 서원의 배치 형식을 취한 비교적 큰 규모의 재사이며, 누문을 제외한 목조 건물들은 당시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강당은 고급스럽게 꾸민 상부가구와 중건 이전 시기의 청방간 개구부 형식, 그리고 귀한 만곡재 대들보 등에서 격조 높은 운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