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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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東輔 |
영어음역 | Gwon Dongbo |
이칭/별칭 | 진경(震卿),청암(靑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민석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 횡성현감을 역임한 권계경(權啓經)의 현손이며 부호군 권곤(權琨)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성균생원 권사빈(權士彬), 아버지는 우찬성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 어머니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직장(直長) 최세연(崔世演)의 딸, 처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문완(朴文琬)의 딸이다. 후사가 없어 동생 권동미(權東美)의 2남을 양자로 삼았다.
[활동사항]
권동보는 안동부(安東府) 춘양현(春陽縣) 유곡리(酉谷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르침을 받다가 의정부찬성 이장곤(李長坤)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스무 살 때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음직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다. 1542년(중종 37)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47년(명종 2) 아버지 권벌이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仵, 일명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귀양 가서 1년 만에 죽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선조가 즉위하고 아버지가 신원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자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직장, 주부, 좌랑, 정랑을 거쳐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역임하였다. 만년에 아버지 권벌의 농장이었던 춘양의 운곡천 가에 거연헌(居然軒)과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짓고 늘 읊조리면서 스스로 음악을 즐겼다.
권벌, 권동보, 권래(權來)는 3대에 걸쳐 많은 정자를 짓고 경영하였다. 거연헌이 화재로 소실되자 거연헌 터에서 몇 백보 떨어진 곳에 권래가 한수정(寒水亭)을 지었다. 또 권벌이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누마루 6칸의 청암정(靑巖亭)을 지었고 뒤이어 권동보가 누마루 밑에 담처럼 축대를 쌓고 방 2칸을 덧붙였다. 또 석천정사는 권벌이 산굽이를 돌아드는 계곡이 넓게 열리는 곳에 대를 쌓고 뒤이어 권동보가 정사를 세우고 다시 권래가 부속건물을 지었다.
[저술 및 작품]
『암천세고(巖泉世稿)』 권1과 권2에 권동보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권동보의 묘갈명을 지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권동보의 만년에 대해 “시내 위에 집을 지어 석천정사라 이름 하였고 산 속에 거연헌을 두어 모두가 천석(泉石)이 있는 곳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평소에도 사죽(絲竹)이 그치지 않았으며 늘 읊조리면서 스스로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인 권벌의 죽음이 그에게 가져다 준 충격이 적지 않았던 까닭에 문인적 풍류가 우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황의 문도들과 주고받은 시편들 대부분의 내면적인 정서가 주변의 산수자연을 빌어 담담하게 표출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와단(臥丹)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