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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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肇瑞 |
영어음역 | Son Joseo |
이칭/별칭 | 인보(引甫),면재(勉齋),격재(格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정평공(靖平公) 고조부는 손홍량(孫洪亮), 증조부는 좌대언(左代言)을 지낸 손득수(孫得壽), 할아버지는 한성판윤 손영유(孫永裕), 아버지는 장흥고사(長興庫使) 손관(孫寬),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김흡(金翕)의 딸, 처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광흥승(廣興丞) 하숙(河潚)의 딸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손윤하(孫胤河)는 광흥승(廣興丞)을 지냈고, 차남 손윤한(孫胤漢)은 장흥부사를 지냈다. 딸 둘은 부사직을 지낸 류수원(柳秀源)과 고맹원(高猛元)에게 각각 시집갔다.
[활동사항]
손조서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학사에 보직되었다. 1451년(문종 1) 병조정랑을 거쳐 봉산군사(鳳山郡事)를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하였으며,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손조서는 평소 사물잠(四勿箴)을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여겨 외고 다녔으며 몸소 실천하려 하였다. 또 손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들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연구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사육신의 한사람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과 도의지교를 맺어 경학(經學)을 강론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격재집(格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