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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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堣 |
영어음역 | Yi U |
이칭/별칭 | 명중(明仲),송재(松齋),청해군(靑海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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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성별 | 남 |
생년 | 1469년 |
몰년 | 1517년 |
본관 | 진성 |
대표관직 | 형조참판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공신.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아버지는 이계양(李繼陽)이다. 조카가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활동사항]
이우는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溫惠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98년(연산군 4) 3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정자에 임용되고 이어 예문관검열, 예문관대교, 예문관봉교를 거쳤다.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에까지 올랐다. 사간원정언 재임 중 온갖 화란을 빚어내는 간사한 무리를 탄핵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논계(論啓)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504년 사간원헌납에 복직해서 다시 임숭재(任崇載) 등에 대해 벼슬자리가 합당치 못하다고 논계하고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계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협력하여 그 공로로 정국공신4등에 녹훈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을 겸하였다. 1512년(중종 7) 정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조카인 이황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쳤다. 이 무렵 영해부사와 김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대로 향원에 숨어 자질(子姪)을 가르치며 독서와 저술에 잠심하였다.
1514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에 불미스런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 승지들과 함께 대간의 탄핵을 받아 훈적(勳籍)이 삭탈되었다. 하지만 이우는 청해군에 봉해졌을 때부터 번번이 관직을 사양했기에 훈적이 삭탈된 건 잘된 일로 여겼다. 다만 임금을 속이고 구차한 처신을 했다는 누명이 께름칙하여 자신을 해명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렸다. 훗날 사관들은 이우가 폐주 연산군에 대해서도 도리를 다했고 새 임금 중종을 영립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듬해 안동부사에 부임되어 목민(牧民)의 본보기로서 칭송이 높았으며, 밝은 정사로 가선대부의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같은 해 겨울 병으로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다. 조야가 못내 애석히 여겼으며 나라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송재집(松齋集)』 원집과 속집 1책이 있다. 기타 저술로 『귀전록(歸田錄)』 1권이 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은 전하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1667년(현종 7) 고향 사림이 이우의 구거(舊居)인 예안현 온계리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워 이우를 제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