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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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桂洪 |
영어음역 | Gwon Gyehong |
이칭/별칭 | 권계홍(權桂弘),계승,해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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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71년 |
몰년 | 1945년 |
본관 | 안동 |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승(繼承), 호는 해암(海岩)이다. 1871년(고종 8)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해천마을에서 출생하여 1945년 사망하였다. 묘는 해천마을 동암사 왼쪽에 있다.
[활동사항]
권계홍은 예안·안동·진보·영양 등지를 무대로 활약한 박처사(본명 박인화) 의진(義陣)에서 활동하였다. 박처사는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권계홍은 박처사 의진에 들어가 의병 30~40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자위단(自衛團)과 영양군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과감한 활동을 펼쳤다. 박처사 의진은 1905년부터 1908년 여름까지 활동하면서 류시연·신돌석 의진과 연대를 맺고 있었다. 특히 류시연 의진과 연합하여 1907년 2월 예안분파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1908년에 들어와 임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박처사는 같은 해 5월 임동면 대곡리에서 밀정에게 살해되었다. 박처사가 순국한 뒤에도 권계홍은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14일(음력) 영양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1909년 1월 2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내란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권계홍은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