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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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道益 |
영어음역 | Gwon Do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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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성별 | 남 |
생년 | 1889년 |
몰년 | 1919년 |
본관 | 안동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1889년(고종 26)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출생하였다. 묘는 와룡면 태리 공동묘지에 있다.
[활동사항]
권도익은 1919년 3월 18일에 일어난 안동면 2차 시위와 3월 23일에 일어난 3차 시위에 참가하였다. 안동면 2차 시위는 안동교회와 송기식을 비롯한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3월 18일 장날 낮 12시경 삼산동 곡물전(지금의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기독교인 30여 명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이 먼저 울렸다. 이어 송기식·류동붕(柳東鵬)·송장식(宋章植)·송홍식(宋弘植)·권중호(權中鎬) 등의 유림들이 이끄는 시위대가 합세하였다. 이 날의 만세 운동은 3월 19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안동교회와 송기식 계열이 주도한 2차 시위와는 달리 3월 23일의 3차 시위는 안동군 전체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여 시위 인원은 약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맞선 일제 경찰과 수비대, 안동 거류 일본인으로 구성된 자위단의 공격과 탄압은 극에 달했으며, 그 과정 중 권도익은 서부동 시가지에서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