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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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洛 |
영어음역 | Gim Dae-rak |
이칭/별칭 | 중언,비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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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845년 |
몰년 | 1914년 |
본관 | 의성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의성(義成),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이다.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기도 했다. 1845년(헌종 1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김대락은 1845년 안동에서 세가 좋았던 천전(川前: 내앞) 마을에서 태어나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 숙부 김진기, 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학자였으며, 특히 김진기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안동의 전기 의병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이렇게 김대락은 좋은 집안의 장자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며,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는 수구적 삶을 66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 후반기는 변화의 시기였고, 지식인으로서 향당의 안정된 삶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변화의 바람은 가까이에서 불었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었고, 상투를 자른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신학문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은 1909년 초 노유(老儒)로서는 하기 힘든 일대 전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협동학교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또 한 번 고된 길을 선택하였다. 일가를 이끌고 만주 망명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만주 망명은 자정적(自靖的) 성격이 강한 망명길이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김대락은 망명 후 다시 한 번 사상적 진화를 보여주었다.
1911년 윤6월 12일에 작성한 신흥학교 「권유문」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김대락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 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1913년 「공리회 취지서」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김대락은 삼원포의 한인 단체였던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공리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김대락이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 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 망명 한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김대락은 만주 망명 후 줄곧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백하일기(白下日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