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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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鳳 |
영어음역 | Gim Jaeb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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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성별 | 남 |
생년 | 1891년 |
몰년 | 1944년 |
본관 | 풍산 |
대표경력 |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주서(周瑞), 호는 근전(槿田)이다. 1891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활동사항]
김재봉은 1908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 경성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염직과를 3년간 수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917년 풍산 오미동에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9월경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가 되었다가 1920년 말 『만주일보』가 폐간되면서 퇴직하였다.
1920년경 김재봉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과 서울에서 만나, 그로부터 받은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을 대구 지역에 보급시키려다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았다. 1921년 9월에 출옥한 김재봉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동년 11월에는 베르흐네우친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참석하였고, 대회 결렬 이후에는 치타에서 소집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김재봉은 블라디보스토크 꼬르뷰로(고려공산당 중앙총국)에 참가하였다. 5월에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국내에 들어와 신사상연구회 조직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설치한 후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동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으며, 1944년 3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김재봉의 생가 앞에 어록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