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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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成 |
영어음역 | Gim Jaes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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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
성별 | 남 |
생년 | 1897년 |
몰년 | 1982년 |
본관 | 안동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안동면에서 일어난 3·1만세시위에 참여한 김병우(金炳宇, 1879~1936)이다. 1897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재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안동읍 화성동으로 이사하였다. 성장하면서는 안동교회를 다녔으며,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를 수료하였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병우와 함께 1919년 3월 18일 안동면 2차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안동면 2차 만세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김병우, 김익현(金翊顯), 김계한(金啓漢) 등은 서로 의논하여 3월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장날 낮 12시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고, 이들은 안동시 내 곳곳을 다니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져 3월 19일 0시 50분 무렵 2,500여 명이라는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시위대는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인 군청과 경찰서, 대구지방재판소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당시 김재성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세시위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4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