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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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弘植 |
영어음역 | Song H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석동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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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석동동 |
성별 | 남 |
생년 | 1879년 |
몰년 | 1930년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송홍식은 1879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석동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던 중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를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안동면 만세시위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1차는 3월 13일, 2차는 3월 18일, 3차는 3월 23일이었다. 이 가운데 송홍식은 3월 18일 2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안동면 2차 만세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송홍식은 류동붕(柳東鵬)·송기식(宋基植) 등과 의논하여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장날 낮 12시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송홍식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시위 군중과 함께 안동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다가 3월 19일 0시 50분 무렵 2,500여 명이라는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군청·경찰서·대구지방재판소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송홍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