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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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道發 |
영어음역 | Ryu Dobal |
이칭/별칭 | 승수(承搜),회은(晦隱),유도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순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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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성별 | 남 |
생년 | 1832년 |
몰년 | 1910년 |
본관 | 풍산 |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순국자.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搜), 호는 회은(晦隱)이다. 1832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류진휘(柳進徽)와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자정 순국한 류신영(柳臣榮, 1853~1919)이 아들이다.
[활동사항]
류도발은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무너져 가는 나라를 늘 근심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시무편사론(時務便私論)」을 지어 제자들에게 구습(舊習)을 버리고 각자 나랏일을 책임지고 정성을 다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 밖으로는 교린(交隣)의 도(道)를 강구하면서 안으로는 자강의 대책을 세워야 후일의 성공을 바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10년 8월 21일 류도발은 류도필(柳道弼)의 집에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강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회마을로 돌아와 선영(先塋)을 참배하였다. 이후 류도발은 단식을 결정하고 1910년 11월 10일부터 단식에 들어가 17일 만인 11월 27일 순국하였다. 류도발은 단식하는 동안 유서 및 시를 통해 “종묘가 훼철되었는데 사묘(社廟)를 옛날대로 봉안하는 것은 크게 편치 못한 것이다. 진작 신주(神主)를 묻어 광복(光復)이 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가하다”며 당부를 남기기도 하였다. 결국 류도발은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기자, 선비로서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대절(大節)을 세웠던 것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회은유고(晦隱遺稿)』가 전한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와 「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사당인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