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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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陸史 |
영어음역 | Yi Yuksa |
이칭/별칭 | 이원록(李源祿),이원삼(李源三),태경(台卿)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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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904년 |
몰년 | 1944년 |
본관 | 진성 |
대표경력 | 중외일보사 기자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육사(李陸史)는 본관이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이원록(源祿)·이원삼(源三)이며, 자는 태경(台卿), 호가 육사(陸史)이다. 1904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묘소는 도산면 원촌리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있다. 보문의숙(寶文義塾)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이중직(李中稙)이 할아버지이다.
[활동사항]
이육사는 고향 마을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인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대구로 이사하였고, 아버지의 엄명으로 일찍 결혼하고 처가 마을에 있던 백학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1월 귀국하여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이던 중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던 이정기에게서 베이징 중심의 민족운동에 관한 상황을 듣고, 1926년 베이징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광둥으로 옮겨 1년 동안 중산대학(中山大學)을 다녔다. 중산대학에서 1927년 전 학기를 수학하고 여름에 귀국하였으나, 때마침 터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1929년 5월 풀려난 뒤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1930년 1월 3일자에 「말」이라는 첫 시(詩)를 발표하는 등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1월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3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만주를 드나들다 1932년 4월 베이징으로 가서 의열단의 핵심 요원인 윤세주를 만나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2년 10월 10일 난징에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하였다. 1933년 4월 20일 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7월 서울로 들어왔으나, 1934년 3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었다.
1934년 6월에 출옥하여 문예 활동에 전념하다가, 일제의 한글 사용 규제에 저항하여 한시를 쓰기도 하였다. 「광야」, 「절정」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시 「청포도」가 1939년 『문장』 8월호에 발표되었다. 「청포도」에는 나라를 잃고 먼 이역에서 고국을 그리는 안타까움과 향수, 그리고 암울한 민족 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1943년 4월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활동하던 중 1943년 7월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이육사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향년 41세로 순국하였다.
[저술과 작품]
1946년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