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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2546
한자 烈女
영어의미역 Virtuous Woma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순임

[정의]

전통시대 안동에 살았던 효부나 열부.

[개설]

전통적으로 열녀란 남편이 죽어서 개가할 수 있는데도 개가하지 않는 여인을 뜻하였으나 조선 후기 주로 상층 지식인들이 엮은 한문본 『열녀전(烈女傳)』에는 대체로 남편을 따라 죽은 소위 종사(從死) 여인들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어, 결과적으로 열(烈)과 죽음을 밀접하게 연계시키는 관습을 만들었다.

열녀 개념의 변모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 나온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열녀」 편에는 도미의 처가 수록되어 삼국시대의 열녀 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열전」 열녀 편에는 열녀란 변고를 만나 훼절의 위험을 당하게 될 때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여인이란 개념임을 분명하게 기술하여 그 개념의 변모가 드러난다.

열녀 개념의 변모는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나라의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자결하거나 피살된 여인들이 많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거니와, 이 시기 배 열부, 최 열부 등의 열부(烈婦)란 명칭이 자주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사』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열녀」 편에는 전통적 개념의 열녀와 변모된 개념의 열녀가 뒤섞여 나타난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아내가 따라 죽고 나면 시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양육할 사람이 없어지므로 그 소임을 다 마치고 아이들이 장성한 뒤에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열녀의 전형이라고 권장한 사례도 있다.

[안동의 열녀]

안동은 조선시대 유교 문화권의 중심이자 영남 사림의 본거지였으며 지금까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전통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그런 만큼 열녀가 무수히 많았으며, 관련 기록 또한 많이 전한다. 여기서는 『영가지(永嘉誌)』와 『선성지(宣城誌)』에 기록된 열녀를 기술하기로 한다.

1. 『영가지』에 기록된 열녀

1) 열녀 김씨

열녀 김씨는 유천계(兪天桂)의 처이다. 1401년(태종 1) 남편이 수자리를 서게 되어 길일을 골라 바깥채에 묵었다. 김씨가 방으로 들어가 양식을 싸는데 호랑이가 지아비를 움켜쥐고 달아났다. 김씨가 나무 활을 가지고 큰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남편을 잡고 오른손으로 호랑이를 때렸다. 거의 60보쯤 가자 호랑이가 움켜진 남편을 놓고서 가버렸다. 김씨가 남편을 업고 집으로 돌아와 날이 밝자 소생하였다.

그날 밤 호랑이가 다시 와서 당돌하게도 크게 부르짖었다. 김씨가 문을 열고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너 또한 신령스러운 동물이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심하게 구느냐” 하니 호랑이가 집 옆에 있던 배나무를 물어뜯고 달아났는데 나무가 곧 말라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문이 풍산 상리(지금의 풍산읍 상리리)에 있다.

2) 열녀 김씨

열녀 김씨는 이강(李橿)의 처이다.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길에서 죽자 김씨가 가슴을 치고 뛰며 통곡하였다. 남편의 시체를 껴안고 3일 밤을 지냈으며 입관을 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나도록 밥을 먹지 않다가 50일 만에 죽어 합장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3) 열녀 강소사

열녀 강소사는 첨지 강희철(康希哲)의 얼녀(천첩의 딸)이다. 부(府)의 서쪽 가야촌에 살았다. 사람됨이 명민하고 정숙하였다. 자못 문자를 이해하여 군수 권두문의 첩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두문이 평창군수로 나갔다가 적병에 함몰되었다. 이때 강소사는 난리를 피하여 바위 구멍 속으로 들어갔는데 적병에게 발각되자 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스스로 백길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2. 『선성지』에 기록된 열녀

1) 열녀 권씨

열녀 권씨는 직장 이안도(李安道)의 아내이며 문순공 이황(李滉)의 손자며느리이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이 일찍 죽자 홑옷 차림으로 거적자리에서 밤낮으로 울음을 다섯 달 동안 그치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병이 더욱 깊어졌다. 이후 밥을 입에 대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하면서 머리를 빗질하지 않고 띠를 풀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 가는 것은 다만 후사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고 권씨는 23세의 나이에 자결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으며 『삼강행실도』에 보인다.

2) 열녀 박씨

열녀 박씨는 나이 15세에 관찰사 이명익(李溟翼) 며느리이자 이단표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이 일찍 죽자 박씨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비녀로 스스로 목을 찔러 얼마 동안 기절하였다. 집사람들이 이를 알고 치료하며 지켰다. 이로부터 주야로 호곡하며 자결하려고 하였는데 이렇게 1년 남짓 지난 어느 날 지키는 사람들의 감시가 조금 게을러지자 몰래 빈소 곁에 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숙종 때 정려가 내려졌다.

3) 열녀 류씨

열녀 류씨는 효자 류식의 딸이고 동추 김유음(金有音)의 며느리이자 김시하(金始河)의 아내이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병에 걸리자 화장을 하지 않고 구제하고 간호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남편이 죽자 슬픔이 지나쳐 눈을 잃었으며 머리를 빗지 않고 있다 잘라 버리고 삼년상을 더하였다. 1737년(영조 13) 조세와 부역을 변제해 주고 정려가 내려졌다.

4) 열녀 김씨

열녀 김씨는 문충공 김성일(金誠一)의 7세손 김승락의 딸이다. 17세에 문순공 이황의 7세손 이세명에게 시집갔다. 이듬해에 이세명이 죽자 김씨는 몸소 제사를 지냈다. 후사를 정해 놓고 나서 대상 열흘 전에 몰래 시댁과 친정에 글을 써서 상자 속에 넣어 두고 상복을 입고 띠를 두르고 독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778년(정조 2) 관찰사의 장계로 세국이 면제되었다.

5) 열녀 이씨

열녀 이씨는 김형국의 현손 김관유의 아내이다. 나이 18세에 시집갔는데 19세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였으나 시부모가 애통하게 만류하여서 마음을 고쳐먹고 연명하여 효도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갑신년에 어머니 침소에서 잠을 잤는데 강성한 도적 10여 사람이 이씨를 묶어 가니 죽음에 다다라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찾아 구했는데 열흘 동안 밥을 먹지 않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이듬해에 도적을 잡아 죽이고 정려가 내려졌다.

6) 열녀 이씨

열녀 이씨는 선비 이만철의 아내이고 참판 이귀운의 증손녀이다. 남편이 제사 지내러 갔다가 돌아옴에 병이 심하여 보름 동안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나 죽었다. 시체에 임하여 한 번 호곡하며 땅에 엎드려 얼마 동안 기절하였다. 시아버지가 죽을 권하면 다시 한 그릇을 찾아 먼저 시부모를 드리고 거짓으로 끙끙거리며 먹었으며, 여막에 몸을 숨기고 창을 봉하고 문을 잠그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정려가 내려졌다.

7) 열녀 김씨

열녀 김씨는 문순공 이황의 12세손 이중건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비녀로 넓적다리를 찌르고 목구멍에 꽂으니 집안사람이 구제하여 겨우 살아나서 도리어 시부모를 위로하였다. 시부모 앞에서는 억지로 먹고 마셨지만 물러나면 토해서 개를 먹였다. 잠자리에 한 덩어리의 돌을 준비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2년이 되어서 홀연히 피를 두어 말 토하고 밥을 먹지 못하여 점점 몸이 쇠약해졌다. 남편의 제삿날이 되자 몸을 청결하게 하고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예에 맞게 옷을 갈아입고 이튿날 죽었다. 1854년(철종 5)에 정려되었다.

8) 열녀 류씨

열녀 류씨는 이홍중의 아들 이익교의 아내이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자 류씨가 말하기를 “남편의 중형을 대신하여 독약을 마시고 칼에 엎어져 죽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목매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히 그 남편을 석방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중히 검토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1.22
김** 국어사전에 손자며느리가 손부(孫婦)라고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런 답변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 이용자 참여글을 올렸었는데 역시... 우리말 표기를 우선시 하신다니 '손자의 아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손자며느리' 보다는 더 정확한 내용인 '손자의 아내'라고 쓴다면 표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시 검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013.01.15
관**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손부(孫婦)"는 손자며느리(손자의 아내)를 칭합니다.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서는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한자표기 보다는 우리말 표기를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1.15
김** 2. 『선성지』에 기록된 열녀. 1) 열녀 권씨는 직장 이안도(李安道)의 아내이며 '문순공 이황(李滉)의 손자며느리이다.'에서 '손자며느리'를 '손자의 아내'인 손부(孫婦)라고 해야 하는것 아닙니까? 본문에 나와 있는대로 '손자며느리'라면 손자의 며느리로 '증손부(曾孫婦)'를 이르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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