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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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獐項口縣 |
영어의미역 | Janghanggu-hyeon |
이칭/별칭 |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계형 |
[정의]
삼국시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안산이 사료에 처음으로 나타난 때는 삼국시대이다. 삼국시대에 안산은 본래 백제 땅이었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펴 한강 이남까지 점령하면서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때 안산을 고구려 지명으로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하였다.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장구군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안산현이다[獐口郡 本高句麗獐項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장항구현은 다른 이름으로 고사야홀차라고 한다[獐項口縣 一云古斯也忽次]”라고 되어 있다. 이때 장항구(獐項口)에서 장(獐)은 노루, 항(項)은 목, 구(口)는 고지·곳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장항구는 노루목곳으로 풀이된다. 고구려 때 장항구현의 읍치가 있었던 장곡의 지세가 노루의 입처럼 생겨 이름을 장항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사야홀차는 ‘곧은곳’으로 풀었다.
[내용]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로 볼 때 고구려 장항구현은 치소(治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5년 고구려의 영토가 된 안산은 551년(성왕 29) 백제에 의하여 탈환되고, 553년 다시 신라에 귀속될 때까지 대략 70년간 고구려의 지방 행정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때 안산 지역은 장항구현으로 현이 설치되어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던 그해 한산(광주)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장관으로는 군주(軍主)가 중앙에서 파견되었는데, 군주는 고구려의 남부 장관이었던 욕살이 수행하던 종래의 임무를 대신하였다. 그러면서 장항구현은 신주의 관할로 넘어갔다.
신라의 제도로 후방의 군에는 군사대등(郡使大等)이 파견되었고, 일선의 군에는 당주(幢主)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으며, 현에는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장항구현에는 도사가 부임하였을 것이다. 도사는 신주 군주의 지휘 감독 아래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상황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한 685년(신문왕 5)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삼국 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 장항구현은 장구군(獐口郡)으로 승격되었는데, 군으로서의 지위는 신라가 망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고려 초에 안산군(安山郡)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