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15 |
---|---|
한자 | 萬戶 |
영어음역 | Manh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설치된 초지량영를 총괄하던 무관 직책.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안산 일대 해안 경비를 위해 초지량영(草芝梁營)를 설치하였고, 이곳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수군만호 1인을 배치하였다.
[관련기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중종 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 안산군조에 당시 안산군 서남쪽에 초지량만호를 설치하고, 이곳에 수군만호 1인을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초지량만호에는 중대선 5척, 무군선(無軍船) 4척 등 총 9척의 배가 있었다. 수군은 623명이었으며, 그중 장번(長番) 수군이 8명이었다.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초지량에 갯벌이 밀려와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해지자 사곶(沙串)으로 영을 옮겨 만호가 주둔하게 하였다.
1451년(문종 1) 7월 물이 깊어져 물가가 묻혀서 배를 댈 만하고 또 소릉(昭陵)과 가까워 수비의 필요성이 있다고 하여 다시 초지량으로 옮겼다. 1477년(성종 8) 6월에는 종전 영종포(永宗浦)에서 관장하던 소홀도(召忽島)와 이작도(伊作島) 두 섬에 있는 목장을 이관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변천]
1656년(효종 7) 초지진(草芝鎭)을 강화도로 옮겼는데 안산의 초지진을 일초지(一草芝), 강화도의 초지진을 이초지(二草芝)라 불렀다. 그러나 『여지도서』에 “금폐(今廢)”로 기록된 것을 보면 이후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