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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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明國 |
영어음역 | Gim Myeongguk |
이칭/별칭 | 김명국(金命國 또는 金鳴國),천여(天汝),연담(蓮潭),국담(菊潭),취옹(醉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국담(菊潭)·취옹(醉翁). 김명국은 한자를 달리하여 김명국(金命國), 김명국(金鳴國)이라고도 표기한다. 아버지는 김중휘(金重輝),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경복(李慶福)의 딸, 처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활동사항]
김명국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는데 사행 기간 동안 그림 요청이 많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1647년(인조 25)에는 창경궁 중수 공사에 책임화원으로 참여하여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총괄하였다. 1651년(효종 1)에는 한시각(韓時覺)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하였다.
김명국의 성격과 그림에 대한 당대의 평을 보면, 우선 정내교(鄭來僑)는 『완암집(浣巖集)』「화사 김명국전(畵師金鳴國傳)」에서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취한 뒤에 그려진 것이다.”라고 김명국의 성품과 기질을 묘사하였다.
또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라고 하여 신필(神筆)로 극찬하고 있다.
[학문과 사상]
김명국의 그림은 회화사적으로 볼 때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중국 명대(明代) 절파(浙派)인 오소선(吳小仙) 일파의 소위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화풍으로,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또 김명국은 선종화에도 뛰어났는데 대담하고 힘찬 감필(減筆)이 특징이다. 김명국의 화풍을 이어받은 대표적 화가로 조세걸(曺世傑)이 있다.
[저술 및 작품]
주요 작품으로는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달마도(達磨圖)」·「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관폭도(觀瀑圖)」·「은사도(隱士圖)」·「투기도(鬪碁圖)」·「고사관화도(高士觀畵圖)」·「어정산수도(漁艇山水圖)」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도석인물화첩(道釋人物畵帖)』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