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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515
한자 棺-
영어의미역 The Well of a Coff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복수담|지명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단종|현덕왕후|세조|관리|농부|조광조
관련지명 능안|양화나루|동구릉|관우물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현덕왕후의 복수|세조의 복수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서 관우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9년 5월 27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주민 김정애[여, 68]가 구연한 것을 이한기가 채록하여 1990년 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내고장안산』에 수록하였다. 이후 1999년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산시사』에 재수록하였다.

[내용]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능안에 가면 소릉(昭陵)이 있는데, 이 능은 단종(端宗)[1441~1457]의 어머니이자 문종(文宗)[1414~1452]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단종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능안에 묻혔다. 그런데 세조(世祖)[1417~1468]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 단종을 죽이고 현덕왕후소릉마저 폐지시켜 버렸다.

그 이전 세조단종을 죽이려 했을 때의 일인데, 하루는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얼굴 가득히 분노의 빛을 띠고는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 두지 않겠다.” 현덕왕후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사라져 버렸다.

세조는 반정 이후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이런 꿈을 꾸고 나니 마음이 섬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동궁의 내시가 급히 들어와 세조에게 말하였다. “동궁마마께서 주무시다가 가위눌림이 되어 매우 위중하옵니다.” 세조는 꿈속의 현덕왕후 말이 생각나 급히 동궁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동궁은 숨이 끊어진 뒤였다.

세조는 이것이 필시 현덕왕후의 보복이라 단정하고 크게 노하여 현덕왕후의 묘인 능안소릉에 사람을 보내어 파 보라고 명하였다. 왕의 명을 받은 관리들이 소릉에 도착하였을 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능에서 여자의 곡소리가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관리들은 꺼림칙하게 여겼으나 임금의 엄명이라 할 수 없이 능을 파기 시작했다.

드디어 삽과 괭이가 관에 닿았다. 그런데 고약한 냄새만 날 뿐 단단하고 육중한 관은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관리들은 어찌할 수 없이 이러한 사실을 임금인 세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화가 치밀어 도끼로 관을 쪼개 버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관리들이 명령대로 관을 쪼개려고 도끼를 들어 올리자 관이 저절로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진 관리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관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또 그렇게 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난데없이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려 불을 지필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세조는 관을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관을 바다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현덕왕후의 관은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던지 다시 소릉 옆에 있던 바닷가까지 떠밀려 와 닿았다. 지금은 그곳이 육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이 마을 남쪽 어귀로부터 우물터까지 들어왔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떠밀려 와 있었지만 세조가 왕으로 있던 때라 감히 어느 누구도 건져 내 묻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은 썰물에 밀려가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빈 배처럼 둥실둥실 떠돌다가 며칠 후에야 약간 떠내려가 양화나루에 닿았다고 한다.

양화나루에 관이 닿자 마침 그곳에 사는 순박한 농부가 이를 보고는, 현덕왕후의 관을 방치한 무지한 행위를 개탄하면서 밤중에 몰래 관을 옮겨 강기슭 양지바른 언덕 위에 묻어 주었다. 그러자 농부의 꿈속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잘 묻어 주어 고맙다고 말하면서 농부의 길흉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농부는 가세가 번창하여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중종조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조정에 소릉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현덕왕후 관의 종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일과 관계된 관원의 꿈에 현덕왕후가 현몽하기를, “너희들 수고가 많구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내일은 나의 관이 있는 곳을 알게 되리라” 하는 것이었다. 관원이 현덕왕후의 말을 듣고 황공해 하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다.

한편, 관을 묻어 준 농부의 후손들은 관원들이 현덕왕후의 관을 찾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주저하고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현덕왕후가 후손의 꿈에 나타나 “관원에게 관이 묻힌 곳을 알려 주라”고 현몽하였다. 그래서 농부의 후손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려 후한 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어 보니 관의 칠 냄새가 향기로웠고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현덕왕후의 관은 궁중 의식에 따라 문종의 능이 있는 동구릉으로 성대하게 이장하였다. 문종의 능과 현덕왕후의 능은 큰 수풀로 가로막혀 있었는데, 현덕왕후의 능을 모신 뒤부터는 수풀이 말라 죽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이 바다에 버려진 후에 처음 닿은 바닷가는 뒤에 육지가 되어 우물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관이 닿았던 자리라 해서 그곳을 ‘관우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백 년 전에는 어떤 사람이 향나무를 심어 얼마 전까지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관우물도 고목도 모두 사라지고, 1997년에 안산문화원의 주선으로 주식회사 일진에서 세운 표석(標石)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관우물」의 주요 모티프는 ‘현덕왕후의 복수’와 ‘세조의 복수’이다. 세조단종을 내쫓고 죽이려 할 때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세조를 괴롭히며 복수하자 이에 세조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관을 바다에 버리는 복수를 하였다는 복수담이자, 현덕왕후의 관이 처음 닿은 바닷가에 훗날 우물이 생겨 이를 관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설로, 폐릉된 현덕왕후의 묘가 훗날 동구릉 문종의 능 옆에 복위되었다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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