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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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谷洞-城隍祭 |
영어의미역 | Village-Ritual Ceremony of Jaetmeori Village, Seonggok-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
집필자 | 이현우 |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에서 잿머리 성황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성곡동 잿머리 성황제」는 단원구 성곡동의 잿머리에서 매년 행해지고 있는 성황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유래담이다. 경순왕에게 소박맞고 죽은 홍씨 부인과 안씨 부인의 혼령을 위로한 서희에게 무사히 송나라에 다녀올 수 있도록 했다는 보은담이기도 하다.
[채록/수집상황]
1988년 5월 25일 안산시 선부동으로 현지조사를 나가 최내옥·김용덕·이재란 등이 채록하였는데, 이는 1989년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학논집』16에 실려 있다. 1989년 5월 30일 성곡동 주민 박용석[남, 73]으로부터 이한기가 다시 채록한 것을 1990년 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내고장 안산』에 수록하였다. 1997년 선부동 주민 홍한기[남, 64]로부터 이정태가 다시 채록하였으며, 이는 1999년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안산시사』에 수록되었다.
[내용]
성곡동 뒷산 해봉산(蟹峰山)에 서낭당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매년 10월 초순에 당제를 지낸다. 당제가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과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어 굿판을 벌이고, 하루 종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와 놀이를 벌인다. 이 성황제의 유래는 이러하다. 고려 초기에 거란이 북방의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자 고려는 이들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특히 송나라와 사신 왕래가 많은 고려는 이들로 인해 육상교통이 막혀 해로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부시랑[현재의 내무부장관] 서희(徐熙)[942~998]가 마침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위하여 일행을 데리고 안산시 성곡동[예전에는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 나루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 때의 일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장가를 들었으나 첫날밤에 신부를 소박하였다. 소박맞은 경순왕의 부인은 홍씨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안씨였다. 부인은 첫날밤에 소박을 당한 것이 한이 되어 청상으로 죽어서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녔다. 말하자면 고려 시대의 여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희가 송나라로 떠나려고 성곡동 나루에 당도하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바다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삼킬 듯하였다. 일행은 바다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날 저녁, 서희가 잠을 자는데 꿈에 어떤 소복단장한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희는 깜짝 놀라서 호통을 쳤다. “웬 여인네들인가!” 여인은 슬픈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경순왕한테 소박을 맞은 홍씨이고 다른 한 분은 저의 어머니 안씨입니다. 저는 청상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저로 인해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이 한이 되어 이승을 떠돌고 있었는데, 마침 사신 일행이 송나라로 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저희가 거처할 집이라도 만들어 줄 수 없을까 하여 일부러 이렇게 풍파를 일으켜서 못 가게 한 것입니다. 부디 저희 혼령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자초지종을 들은 서희는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 그녀들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서희가 잠을 깨어 보니 두 여인은 없었다.
서희는 정성을 다해 돌로 당집을 짓고 화공을 시켜 꿈속의 두 여인 모습을 담은 영정을 만들어 당에 모셔 놓고 당제를 지내 주었다. 그러자 풍파는 사라지고 바다가 잠잠해져 서희 일행은 무사히 송나라를 다녀왔다. 그 후 송나라를 왕래할 때마다 지성을 드렸고, 어부들도 바다에 나갈 때면 이 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극진히 정성을 드렸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지금까지도 서낭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모티프 분석]
「성곡동 잿머리 성황제」의 주요 모티프는 ‘첫날밤에 소박맞은 홍씨’, ‘모녀의 죽음’, ‘영정 모시고 지낸 당제[위령제]’ 등이다. 홍씨 부인과 안씨 부인의 혼령을 위로하려고 지은 잿머리성황당은, 항로를 트고 외교 임무를 완수했으며 왕비의 원한을 달랜 역사적 의미를 담는 성황당이다. 그 후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은 물론 이곳 백성들도 이 사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극진히 정을 드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지금도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잿머리 성황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