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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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음역 | Seonsa |
영어의미역 | Pre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 |
집필자 | 한준수 |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발견된 역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의 유적과 유물.
[안산의 주거 흔적]
안산은 한반도의 중부 서해안 지역이자 한강 하류 지역으로 이른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여 왔으며 그 흔적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안산에서 인간의 거주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명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신석기시대부터는 분명히 선사시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주변 지역을 참고할 때 안산에서도 구석기시대의 거주 흔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안산 지역은 한반도에서 선사시대 사람의 거주가 시작될 무렵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이후 해안이라는 자연환경이 선사시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산의 자연환경]
선사시대 기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홍적세 기간인 약 12,000년 전까지의 소위 빙하 시대 동안은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대로 찾아왔다. 빙하가 물러난 이후의 시기에도 전반적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기후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약간 덥거나 건조하거나 비교적 추운 기후들이 교대로 나타났다.
기후 변화는 인간의 거주 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해수면의 변화에 따른 서식 방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해안 지역이라는 특성과 서해안이 낮은 바다라는 특성을 지닌 안산 지역은 기후 변화에 따른 서식 방식의 변화를 가장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빙하기 중 가장 추운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8,000~15,000년 전인데, 이 시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약 130m 정도까지 내려가 있어서 안산과 닿아 있는 서해는 거의 다 육지 상태였다. 이러한 해수면은 기원전 5000년경에 이르러 현재와 비슷해졌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낮은 구릉지를 그들의 중요한 식량 공급지로 활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후기구석기시대까지는 대부분 오늘날의 해저면이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서해안 지역에서 후기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안산 지역에는 큰 하천이 없어서 대규모의 인구를 수용할 능력이 없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유적이 형성될 수 있는 퇴적 환경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산 지역으로 흘러드는 소규모의 하천들은 지금은 해저가 된 지역의 어느 지점으로 흘러들어 여기서 비교적 큰 흐름을 형성했을 것이므로, 이러한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많은 유적들이 분포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산 지역은 대규모의 하천은 없지만 평야와 낮은 구릉이 분포하고 있어서 다양한 식량 자원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산 지역 선사 문화의 특성]
안산은 경기 서남부 지역 선사 문화의 일면을 반영하는 곳이다. 안산은 한강 하류 선사 문화의 한 지역적 양상을 띠는 곳인데,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 각 지역에서 나타나는 선사 문화의 복합상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한반도 동북 지역의 선사 문화와 서북 지역의 선사 문화가 이 지역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고, 또한 이 지역에서 새롭게 형성된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간 것으로 확인된다.
문화의 복합적인 양상은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유지되어 고구려 문화, 백제 문화, 신라 문화가 어우러지는 것이 안산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겨진다. 한반도 주민의 이동과 문화의 전파 경로에 있어서 전 시대를 통해서 공통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이러한 주민 이동의 흐름과 문화 전파는 한반도를 X자 모양으로 관통하는 한강이 그 교통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강은 선사시대 사람에게 있어 생활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이동과 확산의 교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한반도 동북 지역인 함경도와 두만강 유역의 사람과 문화가 추가령지구대나 태백 준령을 넘어 중부 내륙을 거쳐서 한강 하류로 유입되고, 이것은 다시 한강 유역의 다른 인접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한편 한반도 서북 지역인 평안도와 압록강·대동강 유역의 사람과 문화는 평야 지대를 세로로 가로질러 남하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다시 한강의 지류를 타고 서해안의 평야 지대를 거쳐 남하한 뒤, 남부 지방의 선사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결국 서북과 동북 지방에 기원을 둔 계통이 다른 문화를 수용하여 남한 지방의 선사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안산은 한강 하류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 지대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시흥과 광명을 매개로 하여 김포반도와 연결되며, 선사시대의 문화적 공통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한강의 흐름을 따라 선사 문화가 서해안 도서 지역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산의 선사 문화는 한강 하류 지역의 선사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기시대]
1.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란 지금으로부터 300만 년 전의 석기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이른바 뗀석기라 하여 돌을 깨뜨려 생활 도구를 만들어 썼다. 이 시기는 현재와는 다른 지질시대인 빙하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생활하였으므로 한반도 전역에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안산 지역에서는 아직 구석기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물의 부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접한 화성군 지역에서 구석기 유물 발견 사례가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중 시행된 지표 조사에서 안산의 남쪽에 해당되는 화성군 지역에서 석영암으로 만든 석기들이 발굴되었는데, 연대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구석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화성과 지형의 특징이 거의 같은 안산에서도 소규모 하천을 무대로 간헐적으로 출몰하였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는 유물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홍적세 후반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련 유적이 안산 지역 갯벌을 비롯해 해수면 아래 존재할 가능성이다.
2.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는 농경과 목축에 의해 식량 생산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금속이 활용되기 이전의 문화로서 대략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1000년경에 끝났으며, 인접한 만주 지역은 이보다 이른 시기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의 특성에 따라 몇 개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그스름한 모양을 지닌 빗살무늬 토기의 존재로, 한강 중·하류에 있는 서울 암사동 유적이나 미사리 유적이 그 좋은 예이다.
안산에서도 서해안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석기시대의 토기 문화들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유적이 별망 패총이다. 별망 패총은 인접한 오이도 패총이나 강화도의 삼거리·동막동 유적, 영종도의 신석기 유적, 용유도·영흥도 등지의 신석기 토기 반출 유적들과 토기의 형식면에서 비슷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별망 패총 외에도 대부도 역시 신석기 패총들이 발견된 예가 있으며, 나타난 생활 문화의 양상은 별망 패총의 것과 비슷하다. 별망 패총이나 다른 지역의 패총이 형성되는 동안 이 지역 주민들이 살아온 방식을 패총에서 드러난 증거를 중심으로 복원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시기의 사람들은 어로를 생활 기반으로 하여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 원시 농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시 농경의 존재는 서해안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서북 지역 대동강 연안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서해안을 따라 넓게 분포하는 갯벌에서 굴 등의 패류와 함께 다양한 해양 생물들을 채집하며 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일부는 내륙 지역과 교류를 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안산의 신석기시대는 바닷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수렵·채집·어로를 주로 했던 주민과 문화로서, 이들은 한강 유역의 사람들과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모습은 경기만 지역의 서해안 신석기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는 일반적으로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철기가 나타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청동기가 철기보다 먼저 출현하는 배경은 금속을 제련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 연료인 장작불의 온도가 800~900℃로 구리의 녹는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금속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데 있어 새로운 형식의 토기인 민무늬 토기[無文土器]의 출현 및 새로운 무덤 양식인 지석묘(支石墓)와 석관묘(石棺墓)의 출현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옹관묘(甕棺墓)도 간혹 보이지만 이 두 가지 양식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이 시기는 청동기가 출현하기는 했지만 생산 도구들은 여전히 석기를 주로 사용하였고, 농경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무덤 양식에서 보듯 사회가 복잡해지고 국가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여주군 흔암리나 미사리 등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취락들이 발견되고 있다. 최근 부천시 고강동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취락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구조가 흔암리의 경우와 비슷하여 경기 서해안 지역에도 한강 강변의 청동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산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지석묘이다. 이 지석묘들은 대부분이 바둑판식이라 불리는 남방식으로 월피동·양상동·선부동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하에 토광을 파서 시체를 묻거나 간혹 돌을 깔았다.
한강변의 지석묘는 남방식과 북방식이 혼재하고 있는데 매장 시설이 지상에 올라와 있는 북방식은 강화도에서 춘천을 잇는 선을 남쪽 한계선으로 하고 있으며, 간혹 그 이남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한 예로 안산시 선부동, 광명시 가학동에서 북방식의 탁자식(卓子式) 지석묘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영향이 경기도 서부 일원까지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안산이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경계 지역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지석묘 유적에서는 그다지 많은 유물이 나오지 않아 당시 안산 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상을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안산 지역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은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안산 지역의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부근 지역의 청동기 문화의 양상을 토대로 그 시대를 복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안산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추론해 보면 한강 중·하류의 청동기 문화 주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방형의 반움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며, 대체로 나지막한 구릉지에 여러 채의 집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여주군 흔암리, 부천시 고강동, 파주 지역 유적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청동기시대 마을 부근 평지는 농경지로 이용되고 벼농사도 이루어졌다. 여주군 흔암리나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 유적에서 쌀이 발견된 바 있으며, 김포 지역과 일산 지역에서도 탄화된 쌀이 발견되었다. 즉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강 중·하류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반달형 돌칼이 많이 발견되었다. 부천시 고강동에서는 반달형 돌칼이 네 개 발견되었는데 매우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또한 가학동 유적에서도 돌칼이 채집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수확 도구인 반달형 돌칼의 보편화는 벼농사가 서서히 농업의 주요한 생산 수단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 체제는 점차로 커지고 복잡해졌으며, 어느 정도 인원 동원이 필요한 분묘 형식인 지석묘의 조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적인 인력 동원은 결국 사회의 분화를 가속화하였다. 안산에서 지석묘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회 변화가 이 지역에서도 일어났음을 추측케 하는 증거이다. 나아가 안산을 포함한 한강 하류의 청동기 문화는 토기의 분포 양상으로 볼 때 서북 지방의 토기 문화와 동북 지방의 토기 문화가 혼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강 하류 지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고 안산을 포함한 강화도 등의 서해 도서에서도 그 문화의 일단을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청동기 문화인 요녕식 동검이나 초기철기시대의 한국식 동검을 가진 집단은 출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