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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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漢容 |
영어공식명칭 | Lee Han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필준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 이한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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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이한용 간도 사립 대성학교 2학년 중퇴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이한용 신간회 홍성지회 가입 및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이한용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 사립 학습강습소 교사로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이한용 형평사 본부 중앙집행위원, 지방순회위원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이한용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장으로 활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3년 4월 17일 - 이한용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피체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6년 - 이한용 광주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음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읍내동 92번지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 75번지 |
학교|수학지 | 사립 대성학교 - 중국 간도 |
성격 | 사회운동가|언론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형평사 본부 중앙집행위원|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장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형평사에서 활동하며 사회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
[개설]
1929년 4월 형평사(衡平社) 본부 중앙집행위원, 지방순회위원에 선임되면서 형평사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32년 11월부터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가계]
이한용(李漢容)[1904~?]은 백정(白丁) 출신으로 중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온양면 읍내리[현재 아산시 읍내동] 92번지이고, 이후 온양면 온천리[현재 아산시 온천동] 75번지에서 살았다.
[활동 사항]
이한용은 어린 시절을 중국 간도(間島)에서 보냈다. 언제 간도로 갔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24살 때인 1928년 간도 사립 대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이한용은 귀국하여 신간회(新幹會) 홍성지회에 입회하여 회원으로 활동하고,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 사립 학습강습소 교사로 재직하는 등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25살 때인 1929년 4월 형평사 본부 중앙집행위원, 지방순회위원에 선임되면서 형평사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한용은 지방순회위원으로 강원도 책임자로 파견되어 강원도 형평사원의 교양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형평사 운동은 1920년대 말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활동이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이한용은 28살인 1932년 11월부터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3년 4월 17일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 사무실과 이한용의 집이 경찰에 수색을 당하고 이한용은 체포되었다. 이때 동료 40여 명도 체포와 수색을 당했는데, 형평사 내 형평청년전위동맹(衡平靑年前衛同盟)을 만들어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였다. 경찰은 이한용이 형평청년전위동맹의 경상남도·경상북도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하였다. 재판은 검거 2년 만인 1935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고, 1936년 3월 6일 담당 검사가 징역 4년을 구형하였다. 하지만 이한용은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한용의 동료 대부분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사가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후 이한용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