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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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頤正 |
이칭/별칭 | 약헌(若軒),이재(彝齋),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247년 - 백이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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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284년 - 백이정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298년 - 백이정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파견 |
몰년 시기/일시 | 1323년 - 백이정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
묘소|단소 | 백이정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양각산(羊角山) |
사당|배향지 | 신안원(新安院)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
사당|배향지 | 도통사(道統祠) - 충청북도 충주시 |
사당|배향지 | 도통사(道通祠) -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
사당|배향지 | 난곡사(蘭谷祠)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남포 |
대표 관직 | 첨의평리|상의회의도감사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도 보령 지역 출신의 성리학자.
[개설]
백이정(白頤正)[1247~1323]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 안향(安珦)[1243~1306]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그 후 10여 년간 중국 연경에 머물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고려에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색(李穡)[1328~1396], 권근(權近)[1352~1409], 변계량(卞季良)[1369~1430]에게 차례로 전승되어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의 학문이 되었으며, 조선 왕조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彝齋)이다. 아버지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백문절(白文節),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 참봉 이세주(李世柱)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백이정은 1284년(충렬왕 10)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선왕(忠宣王)[재위: 1308~1313]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으며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 서적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후진 양성에 힘써서, 이제현·박충좌(朴忠佐)[1287~1349]·이곡(李穀)[1298~1351]·이인복(李仁復)[1308~1374]·백문보(白文寶)[1303~1374] 등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사람은 백이정이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의 학통은 이색(李穡)에게, 이색의 학통은 권근과 변계량에게 이어졌다.
선조(宣祖)[재위: 1567~1608] 때 김제남(金悌男)·최기남(崔起南)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권보(權溥)[1262~1346]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다.
[학문과 저술]
백이정은 연경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올 때 주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일상생활에서 예속을 바로잡기 위해 『가례』를 권장하였다. 유고로는 「연거시(燕居詩)」·「영당요(詠唐堯)」·「한벽루(寒碧樓)」·「여홍애집구(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