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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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起 |
이칭/별칭 | 대가(待可),고청초로(孤靑樵老),구당(龜堂),이와(頤窩),문목(文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23년 - 서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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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2년 - 서기 성리학에 정진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서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후학 양성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서기 공암서원[현 충현서원] 창건 |
몰년 시기/일시 | 1591년 - 서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52년 - 서기 시호 문목(文穆) 추증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
부임|활동지 | 공암서원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
사당|배향지 | 충현서원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이천 |
[정의]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출신의 조선 전기 학자.
[개설]
서기(徐起)[1523~1591]는 남포 제석동[현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학자로 충청우도 최초의 서원인 공암서원(孔巖書院)[현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창건하였다.
[가계]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구당(龜堂)·이와(頤窩)이다. 할아버지는 서승우(徐承佑)[1484~1522], 아버지는 서구령(徐龜齡)[1506~?]이다.
[활동 사항]
서기는 충청도 남포, 즉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출신이다. 서기의 할아버지 서승우의 묘갈문[2000년 성균관장 박중훈(朴重勳) 찬]에 의하면, 서승우는 김일손(金馹孫)[1464~1498]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다가 연산군(燕山君)[재위: 1494~1506] 대에 남포 제석동 조잠산(潮岑山)에 은거·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공부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때부터 남포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기가 태어날 때에 특이한 향내가 집 안에 진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곧 홍주 상전리[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려운 형편에 힘든 삶을 살았다. 홀로 공부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 선학(禪學)까지 섭렵하였지만, 20여 세 무렵에 6세 연상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을 만나 불교를 버리고 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홍주(洪州)에 사는 이지함을 만나기 위해 8㎞[20리] 거리를 도보로 매일 다녔다.
이지함은 서기를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1512~1554]에게 나아가 3년간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성리서를 체계적으로 배우도록 하였다. 서기는 이중호가 서울에서 타계하기 직전까지 가르침을 받고, 이후 이지함과 함께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제주도 한라산에 올랐다. 일설에 의하면 한라산에서 이지함과 헤어져 중국으로 항해하여 주자(朱子)의 진상을 구해 왔다고 한다.
서기는 홍주에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천하고자 강신당(講信堂)을 세웠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서기를 미워해 집에 불을 질렀고, 서기는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 홍운동으로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서기의 학문이 널리 알려지며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1572년 50세 때에는 이지함과 조헌(趙憲)[1544~1592]이 지리산으로 찾아와 머물기도 하였다. 4년 만에 지리산 생활을 청산하고 충청도 공주의 공암(孔巖)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사양당 심충겸(沈忠謙)이 서기를 공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서기는 공주 공암에서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충청우도 최초의 서원인 공암서원(孔巖書院)을 창건하였다. 공암서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신분이 한미(寒微)[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함]하여 조정에 천거되지 못한 채 평생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은거자수(隱居自修) 하였다. 1800년대 후손 집안에 전해지는 산송(山訟)[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訟事)] 문서에 현감이 내린 판결문 중 “고청선생여화담위일대선현(孤靑先生與花潭爲一代先賢)”이라는 글귀가 있어, 1800년대까지도 서기를 서경덕(徐敬德)[1489~1546]과 함께 일대의 선현으로 존경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묘소]
서기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1752년(영조 28) 추증되어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