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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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致遠 |
이칭/별칭 | 고운(孤雲),해운(海雲),문창후(文昌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강종원 |
출생 시기/일시 | 857년 - 최치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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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868년 - 최치원 당나라 유학 |
활동 시기/일시 | 874년 - 최치원 당나라 빈공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885년 - 최치원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894년 - 최치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 조 건의 |
추모 시기/일시 | 1020년 - 최치원 내사령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021년 - 최치원 문창후 시호 추증 |
사당|배향지 | 무성서원(武城書院)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
사당|배향지 | 서악서원(西嶽書院)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서악동 615] |
성격 | 문관|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아찬|통일신라 성주산문 성주사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비문을 지은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의 문관이자 학자.
[개설]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 6두품 출신으로 868년(경문왕 8)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18세에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하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등 명문(名文)을 써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885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894년 진성여왕(眞聖女王)[?~897]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아찬에 제수되어 시정개혁과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보령 성주사지에 현존하는 대낭혜화상탑비문을 찬(撰)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며, 경주 사량부(沙梁部)[本彼部] 출신으로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출정할 때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명을 떨쳤다.
885년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보령시 성주사에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무염(無染)[800~888]이 사망하자 진성여왕의 명으로 대낭혜화상탑비문을 찬하였다. 890년 이후에는 대산군(大山郡)[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충청남도 서산시]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어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고 아찬(阿飡)에 임명되었다. 최치원은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진성여왕이 왕위를 효공왕(孝恭王)[?~912]에게 선양(禪讓)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최치원이 사망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908년(효공왕 12) 말까지는 생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치원이 전국을 유람할 때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보리섬[맥도]의 병풍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다. 그 외에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 불교 관련 저술로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 등이다.
[상훈과 추모]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 추증, 1021년(현종 12)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