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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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稷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신직선(申稷善)[1853~?]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신직선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문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과정을 관련인들의 움직임과 함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윤충하(尹忠夏)는 1919년 2월 19일 거창에서 곽종석(郭鍾錫)을 만났고, 2월 28일에 서울에서 상경한 곽윤(郭奫)·김황(金榥) 등과 모임을 가졌다. 김창숙(金昌淑)은 성주에서 성태영(成泰英)의 연락을 받고 2월 25일 상경하였다. 김황은 3월 2일 대한문 곡반(哭班)에 가던 중에 김창숙을 만나 곽윤에게 안내하였다. 이들은, 3월 4일 유준근(柳濬根)은 전우(田愚), 이중업은 충청북도과 강원도의 동지에게, 김창숙은 경상북도 동지에게, 김황은 곽종석에게 참가와 협조를 구하여 3월 20일경 서울에 모이기로 하였다.
곽종석은 3월 9일 김황을 만나고 장석영(張錫英)에게 장서를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김황·권명섭(權命燮)·김수(金銖)에게도 장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김황은 장서 초본을 탈고한 후 3월 15일 김수와 함께 연서인 규합과 발송 자금 모집에 나섰다. 김수는 의령·칠원 등지로, 김황은 거창·합천·진주·하동으로 갔다. 김창숙은 3월 15일 곽종석을 만났고 16일에 영주로 떠나 순흥·봉화에서 연서인 규합에 힘썼다. 권상원(權相元)·권명섭(權命燮) 등의 자청으로 안동·봉화·영주의 서명 규합을 일임하고 장석영의 장서 초고를 받아 다시 곽종석을 찾았다. 곽종석은 장석영의 초고 대신에 김황의 초고를 약간 수정하여 장서원문[2,674자]을 확정하였다. 상경한 김창숙은 김창택(金昌澤)·윤중수(尹中洙)·유진태(兪鎭泰)·이덕위(李德委)·조중헌(趙重憲) 등과 협의하였고, 유진태의 소개로 임경호(林敬鎬)를 만났다. 한편 김복한(金福漢)은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式)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장서를 연명 작성하였고, 임경호가 장서 발송을 준비하였다.
유림 측은 영남 장서를 채택하고 유림대표 137인을 결정하였고, 김창숙에게 그 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3월 말경 용산역을 출발하여 2일 후에 봉천에서 미리 보낸 장서와 자금을 받았고 수일 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이동녕(李東寧)[1869~1940]·이시영(李始榮)[1869~1953]·조성환(曹成煥)[1875~1948]·신규식(申奎植)[1880~1922]·조완구(趙琬九)[1881~1954] 등과 만났고, 국내에서 국권회복단 대표로 상하이에 온 김응섭(金應燮)을 만나 협력하였다. 이들의 충고와 상의로 파리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파리의 김규식(金奎植)[1881~1950]에게 우송(郵送)하여 강화회의에 장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장서의 원문을 윤현진(尹顯振)이 영역(英譯)하여 한문본과 영문본 약 3,000부를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 의장·각국 대표·중국 등 외국의 여러 기관 및 언론계 그리고 국내 향교로 우송하였다. 파리장서가 일제에게 알려진 것은 연서인 송준필(宋浚弼)의 아들 송회근(宋晦根)이 1919년 4월 2일 성주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체포되면서부터이다. 이후 5월 초 연서인인 하용제(河龍濟)의 아들 하홍규(河洪逵)가 단성[산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체포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각 지방 향교로 보낸 장서로 파리장서의 전모가 밝혀졌다.
이 파리장서에서 신직선은 호서 유림으로 위의 인사 외에 유호근(柳浩根)·백관형(白觀亨)·이길성(李吉性)·전병식(全炳軾)·김지정(金智貞)·김상무(金商武)·이내수(李來修)·김학진(金學鎭)·전석윤(全錫允) 등과 함께 연서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