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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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英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2월 15일 - 황영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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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황영수 홍주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20일 - 황영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황영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대창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홍주의병 참가 |
[정의]
구한말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의병.
[개설]
황영수(黃英秀)[1855~1919]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출신으로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황영수는 대한제국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빼앗기자 1906년 1월 충청남도 청양 정산에 내려와 지내고 있던 민종식(閔宗植)[1861~1917]을 비롯한 여러 지사들이 홍주성에서 일으킨 의병에 가담하였다. 황영수가 참여한 홍주의병의 의병 수는 약 3,000여 명 정도였는데, 의병들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장 터에 집합하였다. 이때 참여한 인물은 민종식을 비롯하여 정재호(鄭在鎬), 박윤식(朴潤植), 박창로(朴昌魯)[1846~1918], 안병찬(安炳瓚)[1854~1929], 최상집(崔相集)[1849~1909] 등이었다. 의병대가 대열을 갖추게 되면서 의병들은 광시장 터를 출발하여 홍주의 조양문 밖 하우령에 진을 친 후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다시 광시장 터로 퇴각하여 군제를 바로 잡고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진로를 바꾸어 청양군 화성면 화성장토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유숙하였으나 총격전이 벌어져 의병대가 흩어졌다.
이후 1906년 3월 충청남도 부여의 이용규(李容珪)[1859~1924]가 의병을 다시 모아 서천 일대를 다니며 기병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 홍산의 지티[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민종식을 대장으로 두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황영수는 정재호, 이세영(李世永)[1869~1938]과 함께 중군장으로 선임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홍주성을 탈환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황영수는 일본군 수비대와 홍주성에서 10여 일 동안의 공방전을 전개하여 적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는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5월 31일 홍주성이 함락되면서 민종식 의병장과 함께 탈출하다가 결국 붙잡혔다. 황영수는 1907년 7월 2일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