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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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甑山里 坡平 尹氏 世居地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문광균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에 있는 파평 윤씨 세거지.
[개설]
파평 윤씨의 윤황(尹璜)[?~?]이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甑山里)에 이주하면서 입향하게 되었다.
[명칭 유래]
증산리는 한글 ‘시루메’의 한자 표현이었지만, 이후 내증리(內甑里)[증산리 2구]와 외증리(外甑里)[밧시루메의 한자 표현, 증산리 2구]를 합친 말이다.
[현황]
윤황이 조선 중기에 입향한 뒤로 윤기(尹愭)[1741~1826]의 후손들이 지금도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송림마을에서 세거하고 있다.
[입향경위]
명종 대인 1545년 대윤(大尹)인 윤임(尹任)[1487~1545]과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1503~1565]의 파평 윤씨 내부 다툼이었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면서 같은 문중이었던 윤황은 화를 피하기 위해서 많은 일족들과 함께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때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송림으로 입향하게 되었다.
윤황은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인 조카 윤필은(尹弼殷)을 양자로 삼았다. 윤필은의 형 윤명은(尹明殷)[1601~1646]은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전라감사를 사직하고 동생이 양자로 가 있는 송림에서 어머니를 모셨다. 이후 윤명은은 다시 경기도로 돌아갔지만 윤필은은 계속 송림에 세거하였다.
윤필은은 후손이 없어서 친척 윤성을 양자로 들이고 난 뒤에 손자 윤사주(尹師周)를 얻었다. 윤사주는 3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3명의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척 중에 9세손 윤광수(尹光壽)를 양자로 들였고, 윤광수는 아들 윤휴진(尹休進)을 낳았다. 윤휴진은 아들 윤기(尹錡), 윤호(尹鎬), 윤전(尹銓) 3형제를 두었는데, 현재 송림 파평 윤씨 3파를 이룬다. 첫째 아들 윤기와 셋째 아들 윤전은 송림과 서면 마량리 등에 세거하고, 둘째 아들 윤호는 논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