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56 |
---|---|
한자 | 團圓寺 |
이칭/별칭 | 영수암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만수로 582-11[수부리 산16-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성권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4년 9월 1일 -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
---|---|
현 소재지 | 단원사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만수로 582-11[수부리 산16-6] |
성격 | 사찰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 소속 사찰.
[개설]
단원사(團圓寺)는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에서 남쪽으로 약 9㎞ 떨어져 있다. 단원사의 서쪽에는 높이 329m의 봉화산(烽火山)이 있는데, 봉화산은 보령 성주사지 뒤편에 있는 성주산(聖住山)과 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사찰의 중창 직후 단원사라 불리었다가, 이후 영수암(永守庵)으로 고쳤으나 근래에 다시 ‘단원사’로 사찰명을 바꾸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단원사는 통일 신라 말기 범일국사(凡日國師)가 창건한 구룡사(九龍寺)였다고 전하나,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나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단원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폐사지(廢寺址)로 남아 있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37년경 웅천~부여 간 도로가 폐사지를 지나 신설되자 도로 아래에 사찰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중창한 사찰이 오늘날의 단원사이다.
[관련 문화재]
단원사 사찰 내에는 귀부(龜趺)와 승탑(僧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남아 있다. 경내에 있는 귀부는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保寧水芙里龜趺-螭首)’라는 이름으로 1974년 9월 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탑비(塔碑)의 귀부[받침돌]는 4각의 반석(盤石) 위에 용머리를 하고 있는 거북을 조성하였다. 이수(螭首)[머릿돌]는 장방형 육면체로 여의주를 두고 구룡(九龍)이 상쟁(相爭)하는 조각이며, 정면 중앙에는 전자(田字)형의 비액(碑額)이 있으나 글씨는 없다. 귀부와 이수는 근처의 폐사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나, 과거 사역(寺域)이 넓었던 관계로 이렇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비신(碑身)이 없어졌기 때문에 누구의 탑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 국사나 왕사의 자리에 오른 후 입적한 고승의 경우 승탑과 탑비를 세우는 전통이 있는 점으로 보았을 때,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 역시 고려 시대 왕사나 국사를 역임한 고승의 탑비였을 것으로 보인다.
승탑은 기단부와 옥개석만이 남아 있으나 현존하는 부재로 보면,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알 수 없으나 탑비와 한 짝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은 대웅전의 우측에 있으며, 근처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머리는 파손된 것을 근래에 새롭게 복원해 놓았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通肩) 형태의 대의(大衣)를 착용하고 있으나,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일반적인 불상의 옷 주름같이 U자 형태가 아니라 V자 형태로 조각되었다. 왼손은 접어 왼쪽 가슴 부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에 밀착시키고 있다. 허리 아래부터 다리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은 꽃 모양처럼 만든 후 다리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결 문양을 이루고 있다. 가슴의 옷자락 모양과 복부에 꽃 모양 같은 옷 주름의 모습을 통해 보았을 때 조선 전기에 조성된 석불입상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