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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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植筆山神圖白雲寺本 |
영어공식명칭 | Picture of Mountain Deity Painted by Monk Yeongsik, Baegunsa Temple, Boryeong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259-200[성주리 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성권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백운사에 있는 화승 영식이 1869년에 제작한 산신도.
[개설]
백운사(白雲寺)는 주불전인 극락전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규모가 작은 사찰이다. 요사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는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감실 안에 산신도(山神圖)가 걸려 있다. 산신도는 화승(畵僧) 영식(永植)이 1869년(고종 6)에 제작한 것이다. 산신도를 조성한 영식은 알려지지 않은 화승이며,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永植筆山神圖白雲寺本)」이 현재 알려진 유일한 작품이다.
산신도는 2014년 9월 1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명칭은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이다. 산신도의 화기(畵記)에는 ‘동치팔년기사시월십사일봉안우공충우도남포북령성주산백운사산신정(同治八年己巳十月十四日奉安于公忠右道藍浦北嶺聖住山白雲寺山神幀)’이라 적혀 있다. 화기를 통해 산신도가 성주산 백운사의 산신탱화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의 크기는 가로 87.3㎝, 세로 116.4㎝이다.
[산신도의 특징]
산신도는 주로 사찰 내 삼성각에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 독성도(獨聖圖)와 함께 봉안되거나 산신각에 단독으로 봉안되었다. 산신은 자식을 점지해 주고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였으며, 그로 인해 조선 후기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 산신상(山神像)과 함께 산신도가 모셔졌다.
현재 제작 연대가 확실한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의 산신도들이 남아 있다. 1788년(정조 12)에 제작된 경상남도 함양 용추사(龍湫寺) 산신도, 1817년(순조 17)에 제작된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박물관 소장 산신도, 1820년(순조 20)에 제작된 경상북도 의성 고운사(孤雲寺) 산신도, 1831년(순조 31)에 제작된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海印寺) 산신도가 대표적이다.
산신도의 도상은 대체로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마치 신선과도 같이 수염이 길고 백발인 노인형의 인자한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어 앉아 있고, 간혹 시자(侍者)들이 차를 달이거나 공양물을 들고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여성형, 호랑이를 대동하지 않은 제왕형이나 투구를 쓰고 무장을 한 신장형, 그리고 문인 관료 혹은 학자형, 승려형, 그리고 남녀가 함께 등장하는 부부형의 산신도도 종종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산신도에 산신과 함께 주요하게 등장하는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使者)나 화신(化身)의 의미를 지닌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산신도에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귀엽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려지는데, 민간 화풍으로 그려진 까치 호랑이 그림[작호도(鵲虎圖)]의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20세기 이후에는 일본 호랑이 그림의 영향을 받아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무서운 모습의 호랑이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산신은 주로 붉은색 옷을 입고 머리는 상투를 틀거나 민머리이며, 원유관(遠遊冠) 혹은 통천관(通天冠)을 쓰거나 치포관(緇布冠) 위에 투명한 탕건을 쓰는 등 다양한 형태의 관모(冠帽)를 썼다. 손에는 대개 깃털 부채, 파초선(芭蕉扇), 불로초, 불자(拂子)를 들고 있으며, 대동하는 시자들 역시 공양물로 복숭아·유자·석류·모란꽃 등 길상(吉祥)의 의미를 지닌 것들을 들고 있다.
배경은 이상적인 산수를 표현하여 소나무·괴석·폭포·불로초 등이 그려졌으며, 후대로 갈수록 사슴·학·대나무 등 십장생도의 모티프들이나 책거리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기물 같은 모티프들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다. 채색은 주로 진채(眞彩)로 그려지며, 산수는 청록산수로 표현된다.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의 특징]
화면 오른편에 소나무가 서 있고, 소나무 아래에 불화의 주인공인 산신이 붉은색 옷을 입고 호랑이에 기대어 앉아 있다. 호랑이에 기댄 산신의 자세는 조선 후기 산신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산신은 하얀 수염을 기른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유건(儒巾)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있다.
산신의 어깨에는 나뭇잎을 걸치고 있는데, 신선의 형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산신의 지물(持物)은 보통 지팡이나 불로초, 부채 등을 잡고 있으나,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의 산신은 지물로 용뿔을 잡고 있어 특징적이다. 산신의 아래에는 두 명의 동자가 있으며 동자 중 한 명은 과반(果盤)을 들고 있다. 호랑이 위쪽에도 동자와 동녀가 있는데, 역시 과반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산신도 양식을 따르면서 세부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산신도 중 가장 이른 예는 18세기 후반의 작품이며, 현전하는 산신도의 대부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들이다. 산신도는 알려진 작품만 150점 이상으로 여타 불화들에 비해 많은 수가 남아 있어 19세기 이후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 지역의 산신도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한 산신도가 집중되어 있으며,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예는 몇 개 정도에 불과하다. 「영식필산신도백운사본」은 충청남도 지역의 현전하는 산신도 가운데 제작 연대가 앞서는 사례이며, 산신이 기대어 앉은 호랑이·과반을 든 동자와 동녀 등 19세기 산신도의 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고, 전체적인 구성과 표현이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