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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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希堂先生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사현 |
발견|발굴 시기/일시 | 2002년 - 『삼희당선생집』 황의천(黃義千)이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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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발굴처 | 윤석봉 후손가 - 경기도 양주 |
성격 | 문집 |
저자 | 윤석봉 |
권책 | 24권 12책 |
행자 | 10행 20자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에서 활약하였던 한말 의병장 윤석봉의 문집.
[개설]
『삼희당선생집(三希堂先生集)』은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에서 활약하였던 한말 의병장 윤석봉(尹錫鳳)[1842~1910]의 저술을 정리하여 필사한 문집이다.
[저자]
윤석봉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운서(雲瑞), 호는 삼희당(三希堂)이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동당(絧堂) 서응순(徐應淳)[1824~1880]과 진암(鎭菴) 박홍수(朴洪壽)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37세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1819~1891],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1832~1893]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과 동문으로 교유하였다.
윤석봉은 1888년 경기도 양주를 떠나 재종숙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2년 뒤 1890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에 이주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895년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1860~1924], 이설(李偰)[1850~1906] 등 호서 지역의 남당학파(南塘學派) 학자들과 의리(義理)로서 교유하였다. 1898년에는 지역 선비들과 함께 문풍(文風)을 진작하기 위해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에 주희와 송시열의 영당(影堂)인 집성당(集成堂)을 세우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항일 위정척사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1861~1917]이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65세의 고령임에도 참여하였다가 45일간의 구류 후 풀려났다. 1907년에는 지역에서 의병을 선동하고 민심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김복한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65세의 고령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가 투옥 생활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1910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형태/서지]
『삼희당선생집』은 필사본 24권 12책으로, 사주단변(四周單邊), 행자 수는 10행 20자이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구성/내용]
『삼희당선생집』 권 1에는 가(歌) 4수, 사(詞) 1편, 부(賦) 1편과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 2와 권 3에도 시가 수록되어 있다. 윤석봉의 시는 삶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자잘한 일을 소재로 삼아 쉽고 맑은 정취가 느껴진다. 권 4에는 소(疏) 7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 5~14까지는 서간문이 수록되어 있다. 서간문은 중암 김평묵,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1869~1953], 면암 최익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의암 유인석 등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권 15에는 서문(序文), 권 16~17에는 기(記), 권 18에는 서발문(書跋文), 권 19에는 명(銘)·잠(箴)·찬(贊) 등에 속하는 문장이 수록되어 있다. 권 20에는 제문이 수록되어 있고, 권 20 뒤에는 권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제문을 이어 수록한 부분은 권 21로 판단되어 권 20~21은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 22에는 묘갈명, 묘지명, 묘표, 행장, 권 23~24에는 잡저가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