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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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尊敬-企業人一位-柳一韓 |
영어의미역 | The Most Respected Employer In Korea, Ilhan New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변경원 |
[개설]
2004년 4월 23일 국내에서는 최초로 기업인의 이름을 별칭으로 붙인 도로가 생겼다. 부천시는 경인고속국도의 부천 구간 6㎞를 ‘유일한로(柳一韓路)’로 부르기로 하고 유한대학교 도서관에서 선포식을 가졌다. 부천시 관계자는 “국도 명칭을 지자체가 바꿀 수 없어 별칭을 붙이기로 했다”며 “시가 발간하는 관광 안내도 등에 이를 표기해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천시는 유일한이 1936년에 지금의 심곡동 일대에 근대적 제약 공장을 지어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99년 ‘부천시를 빛낸 공덕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부천중앙공원에는 동상을 세워 유일한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러면 유일한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부천시가 이토록 아끼고 기리는 것일까.
[신상(紳商)의 정신으로 일생을 산 유일한]
우리나라 기업 백년을 돌이켜볼 때, 많은 기업인들이 칭찬을 받기보다는 지탄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행적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기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유일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상(紳商)으로 존경을 받았다.
신상이란 조선 말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말로 개화기의 민족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민족 상인들은 자신들이 자기 개인이나 가족의 안락한 생활만을 추구하는 장사치가 아니라 민족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상·공업을 일으킨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신상, 즉 뜻있는 상인이라고 불렀다. 유일한 박사는 일생을 통해 자본주의의 참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 진정한 신상이었다.
유일한이 생각하는 자본주의란 자기의 능력에 따라 할 일을 찾아 하면서 자기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의 생계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서는 항상 부지런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유일한 박사의 자본주의 정신은 유일한의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진다. 유일한은 기업은 정직, 성실, 신용, 근면한 기업 운영을 통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민족과 국가에 진정한 마음으로 봉사해야한다는 사상을 몸소 실천한 참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서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를 물려받다]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난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柳基淵)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떠돌며 상업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자본을 축적한 뒤 마침내 평양에 정착하여 자신의 점포를 마련한 유기연은 처음에는 농산물이나 건어물을 팔다가 점차 서구의 수입품 등을 파는 잡화상으로 변화하면서, 독일산 싱거(Singer) 미싱 등 고급품을 취급하는 도매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기연이 정착한 구한 말 평양은 일찍이 개화되고 기독교가 번성한 도시였다. 서양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조만식(曺晩植) 등의 민족 지도자들도 교회를 중심으로 민중 계몽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또 ‘3만’이라고 불렸던 이승만·정순만·박용만 등이 서구 문물을 익혀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유명한 강연들이 행해지던 곳이기도 하다.
유기연이 평양으로 오기 반년 전인 1892년 3월 캐나다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이라는 캐나다인이 평양에 와 의료 선교를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물에 많은 관심이 있던 유기연은 홀에게서 성경 이야기를 듣곤 하다가 홀의 인격과 봉사 활동에 감동을 받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김확실에서 김기복(金基福)으로 바꾸어 호적에 올렸다. 아내를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복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1893년 첫딸 유한선에 이어 1895년 1월 15일에 장남인 유일형(柳一馨)이 태어났다. 이 사람이 나중에 ‘일한’으로 개명한 유일한이다. ‘형(馨)’은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향기를 멀리까지 번지게 하는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미국에서 신문을 배달할 때 신문배급소에서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일한’으로 기록하자 유일한은 한자로 일한(一韓)으로 쓸 경우 하나의 대한제국이라는 뜻도 되고 세계 제일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되어 한국인이라는 것이 더 부각되리라는 생각에 아예 개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기연은 기골이 장대하고 굳은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 자신의 힘만으로 가업을 일으키고, 9남매를 키워낸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유일한이 고등학교 때 미식 축구 선수로 활동할 만큼의 왕성한 체력과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만큼의 기백 그리고 숙주나물 장사 때와 같은 상업적 재주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고학으로 학업을 마치다]
유일한에게 미국은 새로운 학문과 자본주의 정신을 배우게 해준 제2의 고향이었다. 유일한은 아홉 살 때인 1904년에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레스카주 커니시의 침례교 신자인 두 자매에게 맡겨졌다. 유일한은 이들의 경제적 지원 아래 초등학교를 다니며 집안 일을 도왔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늘 찾아 보답해야 한다는 것은 아버지 유기연이 자녀들에게 전해준 교훈이었고, 유일한은 그 말을 실천하며 근로의 습성을 키워갔다. 한편 커니의 두 자매는 유일한에게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함께 근면과 절약의 생활관을 물려주었다.
16세 되던 해에 유일한은 자신을 돌봐주던 두 자매를 떠나 헤스팅스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유일한은 경제적으로도 독립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유일한은 타고난 체력과 신문배달을 하면서 단련된 달리기 실력을 바탕으로 미식 축구부에 들어갔다. 미식 축구부에서 주전으로 발탁된 유일한은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이유로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
유일한은 1916년 가을 미시건주 앤아버(Ann Arbor)에 있는 미시간주립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천시한 유교적 환경에서 자란 탓에 상과보다는 정치학이나 법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장사 일을 지켜보던 유일한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상과 계통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때부터 사업 수완을 발휘하다]
대학에 입학한 유일한은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다른 학생들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나 보조 연구원으로 돈을 벌거나 장학금을 받는 것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유일한의 선택은 다른 학생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유일한은 수년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통해 머리만 잘 쓴다면 쉽게 돈을 벌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택한 길은 장사였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건너온 중국인들이 철도 건설이 끝난 뒤에도 미국에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을 뒤로 하고 떠나온 중국인들은 향수를 달래기 위해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을 아주 선호하였다. 유일한은 이점에 착안하였다. 유일한은 미국에서도 사용해야 하는 일상 용품들을 중국 것으로 골라 직접 판다면 그 호응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일한의 생각은 적중했다.
유일한은 중국 향취가 담긴 동양 제품들, 즉 비단 손수건, 아이들이 좋아할 중국 인형, 처녀들을 위한 중국식 장신구, 더 나아가서는 카펫까지도 들고 다니며 팔았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수입은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보다도 많았다. 이러한 경험은 유일한이 먼 후일 경영 이론과 경영 이념은 물론 경영 일선의 지도력을 갖추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평생의 반려를 만나다]
이 무렵 유일한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과 중국 학생들을 모아 한중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이 모임을 통해 유일한은 평생의 반려인 호미리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중국 광뚱 출신으로 미국 서부철도 건설 회사 중역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 구내와 앤아버 거리, 휴런 강가를 걸으며 데이트를 했고, 점차 결혼을 기약하는 관계가 되었다.
유일한보다 한 살 아래인 호미리는 미시간주립대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동북부 코넬대학교의 의학부에 진학했고 유일한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의 회계사로 근무했고, 그후 미국에서도 유명한 제너럴일렉트릭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호미리는 미국 최초의 동양인 여성 의사가 되었다. 유일한과 호미리는 1925년 결혼하고 이듬해인 1926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조국의 부흥을 꿈꾸며 유한양행을 설립하다]
유일한은 1925년 귀국하여 12월 10일 서울 종로2가 45번지 덕원빌딩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25년 일시 귀국하여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 유일한이 굶주린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기업을 설립한 것이다. 기업 중에서도 제약업을 택한 것은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8년에는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여, 조선의 관습과 풍습들을 명절·성묘·놀이·역사·학교 등으로 나누어 서술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업종의 다양화와 폭 넓은 선택을 위해 ‘양행(洋行)’으로 출발한 유한양행은 1936년에는 주식 회사로 전환였고,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25번지에 제약 실험 연구소 및 공장을 건설하였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획기적이었던 주식 회사의 발족은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라는 유일한 사장의 경영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기업은 종업원의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주식 회사 유한양행은 종업원들에게도 액면가의 10퍼센트 정도로 주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종업원 주주제를 시행한 것이었다. 유일한은 광복 후에도 불법적인 정치 자금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유일한은 또한 경영의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1962년에 약업계로서는 최초로 주식 공개를 단행하였다. 유일한의 이러한 경영 이념이 높이 인정되어 1963년에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공익포장을 받았으며, 1964년에는 국무총리로부터 우량 상공인 표창, 1968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고,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을 각각 받았다.
[이익의 사회 환원을 위해 교육 사업에 눈을 돌리다]
유일한의 경영 이념의 특징은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었다. 유일한은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기업 경영에서 얻은 이윤을 육영 사업에 희사함으로써 자신의 정직한 청지기적 소유 관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회사는 개인이나 가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기(公器)이며 국가에 의한 보호와 사회의 협조로 기업 이윤을 올렸으므로 그 결과는 당연히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념에 의하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였고, 1954년에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1957년 한국직업학원, 1963년 한국고등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로 개명하였다. 1962년에는 부천군 소사읍 벌웅절리 3-2번지에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하였고, 1964년에 학교법인 유한학원으로 변경되었다.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78년 유한중학교를 폐교하고,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유한공업전문학교는 유일한이 생전에 확보해 두었던 부천시 역곡동에 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1991년 유한전문대학으로, 1998년 유한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유한대학교의 현재 소재지는 부천시 괴안동 185-34번지[경인로 590]이다.
[유언장으로 다시 사회를 감동시키다]
평생을 근면과 검소한 생활로 일관하며 사업과 교육 사업에 온 힘을 쏟던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 세브란스병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세운 유한공업고등학교 내의 묘소에서는 유일한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다시 만날 때’가 슬픔의 오열 속에 조용히 퍼져가고 있었다. 4월 4일 오전 유한양행 사장실에서는 유일한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한 기업인의 유언장 공개 소식을 사회면의 절반 정도를 할애할 정도로 유례없는 관심을 보였다. 기사를 일부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유한양행 창설자인 고 유일한 씨의 유언장이 지난 4일 개봉되어 8일 공개됐다. 유 회장은 유언장에 그가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 9백 41주(시가 2억 2천 5백만 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한의 직계 가족에게는 딸 유재라 여사에게 오류동 유한중·고등학교 교내이자 그의 묘소가 있는 5천 평의 대지를 상속하여 ‘유한동산’으로 꾸미도록 부탁했으며, 손녀 유일링[7세]이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쓰도록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1만 달러(3백 20만 원) 정도를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미국에 있는 장남[유일선]에게는 일체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고 ‘너는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만이 있었다.”
유일한은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 운명체이자 공공의 것이라는 신념을 죽을 때까지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영원한 지표를 세운 것이다. 생전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정부는 1971년에 국가 복지 향상에 이바지한 공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으며, 1995년에는 자유 독립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