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A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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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정지 |
“전통 방식으로 하다 보니 각궁 하나를 만드는 데 재료 준비부터 완성까지 거의 일 년 동안 공을 들여야 합니다.”
일찍이 중국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란 뜻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선사시대부터 활쏘기를 즐겨 하고 궁시(弓矢)의 제작기술이나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방증한다.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김박영 씨는 그의 스승 김장환[초대 궁시장, 1985년 작고]에 이어 부천에서 우리의 전통 활 만들기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김박영 씨가 만드는 우리 활 이름은 ‘각궁’(角弓)이다. 물소 뿔이 들어갔다고 해서 각궁이라 불리는데, 널리 알려진 ‘국궁’이란 말은 양궁이 들어오면서 생긴 상대적인 말이라고 한다.
각궁의 특징은 “멀리 날라 간다”는 점이다. 각도를 잘 조절해서 쏘면 300m까지도 날아간다고 하니, 골프의 드라이브 샷보다 더 멀리 난다고 볼 수 있다. 비결은 정성이다. 1년마다 활 80장(80개)을 만드는데, 한 장 만드는 데 3,800번 정도 손길이 간다. 풀칠만 해도 같은 자리에 15번쯤 하는데, 워낙 풀칠하는 곳도 많고, 깎고 다듬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구한말부터 부천군 소사 지방은 많은 사람들이 활을 쏘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현재 부천을 대표하는 전통활 터 성무정은 1941년 소학정(素鶴亭)이라는 이름으로 30여 명의 사원으로 정을 구성하여 발족시켰으며 현재 부천시립도서관 자리에서 동쪽으로 관(貫)을 놓고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전국체육대회를 비롯하여 매년 전국 규모의 대회가 각 지방에서 10여 회씩 개최될 때마다 단체전 및 개인전에 출전, 상위권의 입상을 독차지하여 부천의 명성을 전국에 드높였다.
“나는 일제 때의 일은 모르지만 구한말부터 활을 많이 쐈다고 들었어. 구한말부터 왜정 초기까지 올 동안 각 면 대항 활쏘기를 했는데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쐈었지.”(이정우, 前 라이온스협회 사무총장, 68세)
벌써 50년이 넘도록 활을 당긴 이정우[前 라이온스협회 사무총장, 68세]씨는 소싯적에 경기대표로 활약할 만큼 각궁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하지만 누구나 활을 당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 활은 돈 있는 한량들만 접할 수 있었을 뿐 상놈 집안 출신은 하고 싶어도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놈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돈은 많았거든. 그래서 그 사람들이 활은 가져오면 마을 어른들이 야 이놈아, 니가 어딜 활을 가지고 오냐고 허허허, 그런 우스운 소리들도 했었지.”(이정우 씨, 前 라이온스협회 사무총장, 68세)
하지만 점차 활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갔고 겉저리에 현대판 활터도 생겨나는 등 활쏘기가 활성화되기 시작되었다. 성무정은 활터로도 유명했지만 부천의 전통 활인 각궁을 제작하는 곳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각궁’은 ‘맥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맥족, 즉 고구려 민족의 활이라는 뜻이다. 기록상에서도 각궁은 삼국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부천은 조선시대부터 각궁을 가지고 다 했다고. 태조부터 각궁을 했다는데 장점이라면 활을 쏘면 반동이 있잖아. 그러면 어깨가 병이 나요. 그런데 이 각궁은 자체 내에서 반동 힘을 흡수를 해 줘서 충격을 막아줘요. 인체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이정우 씨, 前 라이온스협회 사무총장, 68세)
상당히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각궁은 최소 제작기간만 1년이라고 한다. 실제 제작 기간은 4개월 남짓인데 날이 따뜻한 여름에는 풀이 물러져서 접착력이 떨어지므로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는 기간으로 소요하고, 추석이 지나서야 풀을 먹이기 시작해서 겨울에 궁을 만든다. 각궁은 소의 힘줄, 무소의 쁄, 대나무, 참나무, 뽕나무 등으로 만들어지는데, 물 한 동이를 바르는 풀결음을 해내야 제대로 된 활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전통 방식으로 하다 보니 한 장을 만드는 데 재료 준비부터 완성까지 거의 1년 동안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도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잊지 않고 찾아줘 그 보람에 일을 계속하고 있지요.” 부천에 있는 궁시장 김박영 씨의 작업장 ‘부천 공방’에는 그의 막내 아들 김윤경 씨가 대를 잇고 있다.(김박영 씨,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78세)
각궁은 탄력이 좋은 대나무를 주재료로 활체 손잡이 부분에 참나무를 대고 양쪽에는 물소 뿔을 대며 끝부분에 뽕나무를 붙여 만드는데 참나무는 구부려도 잘 구부려지지 않고 물소 뿔은 탄력과 지구력이 강해 열을 잘 받기 때문에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뽕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질기면서도 유연하여 예로부터 활 재료로 쓰여 왔으며, 접착제로는 접착력이 강하고 강도와 탄력이 좋은 민어부레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 다음 활체를 2~3개월 말린 후 그 후면에 소 힘줄(소 두 마리에서 활 1개 분량이 나옴)을 세 번에 걸쳐 7~8겹 붙여 1년 정도 말리면 힘줄이 수축하면서 복숭아 모양으로 오그라든다. 이것을 C자형으로 펴면서 모양을 다듬는데 활 만드는 전 과정 중에서 이 과정이 가장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 단계 후 습기 방지를 위해 C자형 활체에 활피(벗나무 껍질)를 입힌다. 활시위는 명주실 1백 가닥을 꼬아 만들었으나 요즘은 나일론이 섞인 무명실로 대신한다. 양질의 각궁은 정교한 접착, 손잡이 부분의 강도, 완전한 해궁 등 3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쏘는 건 계량궁이라고 해서 값도 싸요. 각궁은 기본이 수십만 원이에요. 그런데 각궁은 아무나 쏘지를 못해요. 그래, 활 쏘는 사람들의 격언이 있어. 남 활 쏘는 데 가서 내 활을 만져보는 사람은 닿지도 말랬다고. 왜냐면 활을 처음 만지는 사람이 대어보면 활이 뒤로 넘어가거든. 그래서 아무나 쏘면 안 돼. 사람의 모양이 다 다르고 성질이 다 다르듯이 같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모양이 다 다르고 성질도 다 달라요. 내 활을 가지고 당신이 쏘면 안 맞어. 내가 활을 몇 십 년 쐈지만 활을 제대로 고르는 것도 고르지도 못해. 활을 만드는 사람도 대략은 알지만 몰라. 활도 재수야. 활도 그냥 봄에는 우습고 놓으면 그만인 것 같지만 실제로 아주 까다롭고 섬세하고 세밀한 물건이라니까.”(이정우, 前 라이온스협회 사무총장, 68세)
이러한 국보급 문화재를 부천에 전수한 장인들은 어떤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을까? 부천시는 국가 지정 문화재 등의 형태를 갖춘 비중 있는 문화재는 없으나 무형문화재는 여러 건을 보유하고 있다. 예컨대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기능보유자 김애선 씨가 부천에 살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인 김박영 씨가 심곡본동 전통 활터 성무정에서 활(각궁)을 만들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은 지정장소가 부천시 원미구 중동 장말이다. 또한 지금은 타계하였지만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기능보유자인 김영철 씨도 부천에 기거하였다. 이 정도의 무형문화재들은 여러 지면들과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는 무형문화재가 바로 궁시장 기능보유자인 김박영 옹이다.
일제시기부터 궁사(弓士)들이 활쏘기를 즐겨온 성무정에는 마디 굵은 손으로 묵묵히 전통 활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이 있다.
실제 각궁의 시작은 성무정 초대사두에 선임된 중고 김장환 옹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은 한국궁도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걸쳐서 각궁의 맥을 이어 온 훌륭한 장인정신의 소유자다.
그 뒤를 이은 궁시장 김박영 옹 또한 활발한 활 제작 활동을 통해 단순한 기술 이상의 자기 수양을 쌓고 있다. 증조부 때부터 5대째 내리 각궁을 만들어 오고 있는 김박영 옹은 부친 김홍경 씨 슬하에서 이것저것 잔심부름 일을 한 것이 활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활을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경북 예천에서 활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이었던 고종사촌인 이치우(작고) 씨 밑에서 활을 제작하는 일을 거들어 주며 생활했다. 그러다가 ‘소사에서 쓸 사람을 구한다더라’라고 넌지시 건네준 친구의 말을 듣고 고종사촌을 거드는 일을 그만두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경기궁의 명인 김장환 선생을 찾아갔다.
당시 김장환 선생은 국궁제작으로 꽤 명망 높던 분이었고 경기궁이라고 하면 누구나 최고급품으로 쳐 주기가 예사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재주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난히 힘이 센 스승 김장환 선생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조궁 솜씨를 지녔을 뿐 아니라 활을 쏘는 실력도 각별했다. 생전 스승의 가르침이었던 “훌륭한 조궁인은 훌륭한 궁도인이다”라는 신념을 받들어 김박영 씨 또한 틈만 나면 성주산 활터인 성무정을 찾아 활시위를 당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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